성경의 형성과 번역


이경민 목사(캘거리제일감리교회, kfmc.calgary@gmail.com 587-432-0691)


<사해사본>


 이번에는 성경의 형성과 번역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전문적인 글이라기 보다 한 목회자의 성경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과 정보들이라고 생각하시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 셀러라는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은 39권의 책들로 이루어진 구약성경과 27권의 책들로 이루어진 신약성경이 합본인 성경전서를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와도 공유하고 있는 반면 신약성경은 기독교만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슬람교도 신약성경을 사용하지만 구약과 신약성경 보다 코란의 권위가 더 높습니다.) 성경은 1,500여년 동안, 40여명의 저자가 기록한 여러 문서들로 이루어졌으며 유대인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경전입니다. 오랜 세월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문학 형태로, 다양한 저자들이 기록했고 또한 하나님의 뜻과 예수가 그리스도임과 예수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전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로는 Canon이고 그리스어 카논(χανων)에서 온 말입니다. 카논은 원래 갈대나 긴 나무가지라는 뜻입니다. 길이를 재는 도구가 없었던 고대에는 이런 것들을 자 대신 썼기 때문에 카논은 결국 어떤 것을 재는 기준, 척도라는 뜻이 되고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라는 말은 성경이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정경화

 성경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문서로 기록되기 전에는 구전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 내려오던 중요한 믿음의 이야기들을 문서로 기록했고 중요한 문서들이 모이면서 경전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형성과정은 워낙 오래된 일이라 확실히 알수 없습니다. 그저 구전이 문서화됐고 아마도 포로 귀환때쯤 정리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현재의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밝힌 것은 A.D. 90년경의 얌니아 랍비 회의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구약을 가리켜서 ‘아벨에서부터 사가랴까지’라는 말씀(눅 11:51)을 보면 A.D. 90년 이전에도 이미 구약 정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벨은 창세기에 나오고, 사가랴는 역대하에 있는데 히브리 구약 분류에는 창세기는 그 첫권이고 역대하가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구약 정경의 형성 시기를 포로 이후 시대인 B.C.440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성경의 원본은 없습니다

 원래 원본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내용과 형태가 다른 사본들이 너무 많아서 원문이 발견된다 해도 사본 중의 하나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원문이 발견돼도 알수가 없습니다. 오래된 성경의 사본들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본들의 발견과 연구를 통해서 구약의 원래 형태를 계속해서 발견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번역한 성경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본학의 결과와 번역된 언어의 변화에 맞게 개정하는 것입니다.


구약, 타나크, 토라

 기독교에서 구약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유대교에서는 “타나크”(TaNaK, תנ"ך )라고 부릅니다. 타나크는 세 구분(תורה 토라, נביאים 네비임, כתובים 케투빔)의 첫자음에 '아' 발음을 붙여 만들었습니다.(괄호 안의 글씨는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읽습니다.)

 '토라'는 구약의 앞에서 다섯권의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가리키는데 보통 '모세오경'이라고 하고 그냥 오경이라고도 합니다. 모세가 기록했다고 전하는 다섯권의 중요한 경전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타나크 중에서도 이 오경에 더 권위를 둡니다. 율법서라고 할수 있습니다. '네비임'은 예언서들입니다. '케투빔'은 성문서인데 경건한 문서입니다. 시편, 잠언, 욥기, 아가, 룻,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대인의 타나크는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과 내용은 거의 같지만 배열 순서가 좀 다릅니다. 성경의 분류와 보는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70인역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일부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인 '디아스포라'들을 위해 그 당시 국제어인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70인역 성경입니다. 70인역 성경은 72명의 지파별 대표들을 뽑아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는데, 나중에 비교해 보니 내용이 똑같았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물론 전설입니다. 이 헬라어 번역성경은 신약에서 인용하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마소라 텍스트'를 줄여서 'MT'라고 표기하고, 70인역은 로마식 숫자 표기로 70인 'LXX'로 표기하고 '셉투아젠트'라고 읽습니다. 이 두 구약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차이는 히브리어 성경(MT)에 없는 책들이 헬라어 구약(LXX)에는 들어있습니다. 지금은 그 책들은 외경(혹은 제2경전)으로 분류되며, 카톨릭에서 정경의 권위보다는 못하지만 참고할만한 책으로 성경에 함께 들어있습니다. 개신교의 성경에는 외경이 없습니다.


외경과 위경

 '외경'(外經, αποκρυφα, Apokrypha)은 정경 밖의 경전이란 뜻으로 쓰는 용어입니다. 카톨릭에서 제 2의 경전이라고 부르며 성경에도 들어가 있고 정경과는 다르지만 읽으면 도움이 되는 것으로 경전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개신교 성경에는 외경이 없습니다. 외경에는 마카베오기 상, 마카베오기 하, 지혜서, 집회서, 유딧기, 바룩서, 토빗기, 에드서(에스테르기) 10장 4절~16장, 다니엘 2장 24~90절, 13, 14장 등이 있습니다.(공동번역 성경과 가톨릭성경 기준) 

 또 '위경'(僞經)ψευδεπιγραφα, pseudepigrapha)이라는 책들도 있는데, 이것은 허위 성경이란 뜻으로 정경과 외경에도 들지 못한 성경입니다. 위경에는 에녹서, 모세의 승천기, 이사야 승천기, 아기 예수전, 마리아의 승천기, 도마복음, 유다복음 등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구약은 모음이 없었다

 AD 500년 이전의 히브리 사본에는 장모음을 표시하는 일부 자음을 제외하고는 모음이 없었습니다. AD 600-950년에 마소라(Masoretes)라고 불리는 유대인 학자들이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서 모음체계와 악센트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데, 현재 한글 성경에 '여호와' 혹은 '야웨'라고 번역된 하나님의 이름이 실은 발음을 모르는 단어입니다. 모음이 없는 글자로 기록된데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의미로 읽지 않거나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라는 말로 대체해서 읽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정확한 발음을 알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자음을 통해서 추측한 발음이 여호와나 야웨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 기독교만의 경전, 정경화 과정

 A.D. 4세기 중엽부터 정경 확립의 중요성을 깨달은 동서 교회는 A.D.363년 라오디게아 종교 회의, A.D.393년의 히포 종교 회의 등 주요한 종교 회의를 거쳐 마침내 A.D. 397년 칼타고 종교 회의에서 현재와 같은 신약 27권의 정경을 정했습니다.

 정경의 목록을 결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자료마다 내용이 차이가 있어서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사도가 직접 썼거나 사도와 직접 관계 있는 사람이 쓴 믿을만한 책(사도성)

2.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됐다고 인정할만한 책(영감)

3. 인정 받은 다른 책과 모순이 없는 책(모순 없음)

4. 교회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책(보편성)


 현재 정경으로 인정되는 성경들은 거의 처음부터 경전성을 인정 받았지만, 정경으로 결정되었어도 마지막까지 약간 논란이 있던 책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정경으로 인정 받은 책들은 '호모루구메나'(Homolo-goumena)라고 불렀고 논란이 있는 책들은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 αντιλεγόμενα)라고 불렀습니다. 안티레고메나에는 베드로전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 야고보서였습니다.

 신약 경전에 대한 논의는 로마의 주교였던 클레멘스의 편지에서 몇권의 책들을 중요하게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후 영지주의 이단으로 정되된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신약의 중요한 문서들을 정경으로 취급했는데, 그는 구약을 무시했고 구약과 관계 있는 책들을 그 명단에서 제외했습니다. 이 일이 공식적 신약성경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줬습니다. 이후 여러 인물들에 의해서 논란을 거듭하다가 공식적인 종교회의에서 신약성경을 확정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의 기록 시기

 현재 우리가 보는 신약성경은 내용의 연대순으로 복음서 네 권이 앞에 있고, 그 이후 이야기인 사도행전이 있고, 그리고 교회 형성 이후의 내용이 담긴 서신서(편지들)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이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로 쓰여준 순서는 이와 다르다고 봅니다. 서신서들이 먼저 기록되었고, 그 다음에 복음서가 기록됐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상 시간 순서로는 복음서의 예수님 이야기가 먼저지만 현실적인 필요성을 생각해보면 교회가 있어서 사도들이 치리해야 할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먼저 있었고, 예수님의 증인이었던 사도들이 죽고, 곧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예수님은 안 오시는 상황에 예수님의 언행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어서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은 따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이어지는 2권이라고 합니다.


성경과 전통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주 다른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독교,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복음의 본질에 있어서는 같은 기독교입니다.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기독'이라는 말이 '그리스도'가 한자로 번역된 말이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종교는 모두 기독교로 보고, 구교와 신교 혹은 카톨릭과 개신교로 구분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현재 개신교는 대부분 루터와 여러 종교개혁자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으며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구호는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이전의 카톨릭이 워낙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성경 말씀의 권위만큼 교황의 권위도 높았습니다. 교황이 무오하다고까지 했으니까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와 비교해 약하지 않았습니다. 개신교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사실 카톨릭은 신약성경을 규정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경성을 판단하고 정했던 교회의 권위가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개신교는 그런 모습을 반대하고 '오직 성경'만이 권위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개신교의 출발점은 카톨릭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좋은 부분이 있었지만, 이전 교회 역사 속의 좋은 전통까지도 모두 포기해야 했고, 성경만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오히려 성경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우상화하는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카톨릭이 교권을 성경만큼 높이 둘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제들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강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책 자체가 귀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은 성경을 봐도 읽을 수 없는 문맹이 많았고, 더군다나 성경은 라틴어 성경(Vulgate, 불가타)을 사용해서 보아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종교개혁과 함께 이룬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발달하기 시작한 인쇄술로 인해서 성경이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고,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기록되고, 후에 구약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그 신구약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이후 독일어 번역부터 일반인들이 읽을수 있는 대중적인 성경의 시대가 열리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언어로 번역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자국어로 된 성경이 중요하고 필요에 의해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소수 민족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 번역의 역사를 대략 살피면, 앞에서 말한 라틴어 성경을 쓰는 중세 시대에 고대 영어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했흡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의 영어와 너무 다르고, 많이 남아있지도 않고, 대중들이 읽도록 번역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완역한 것이 위클리프 성경입니다.(1382) 이 위클리프 성경은 루터의 독일어 성경보다 먼저 번역된 영어성경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지고 번역한 틴데일 성경이 루터의 독일어 성경과 비슷한 시기에 나옵니다.


KJV만이 올바른 성경?

 우리말 성경에도 여러가지 번역이 있듯이 주요 언어들은 한가지가 아닌 여러가지 번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성경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KJV라고 하는 King James Version 성경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성경은 1971년 영국에서 번역된 영어성경으로 여러가지 면에서 훌륭한 성경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흠이 없는 번역이라고 흠정역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대의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이후에 더 많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번역 성경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 성경만이 온전한 성경이라는 주장에는 반대합니다. 번역성경을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습니다.


<1887년 로스 선교사 번역팀이 완간한 신약 '예수셩교젼셔'>


한글성경 번역

 우리 땅에 처음 들어온 성경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아니라 한문성경이었습니다. 한문성경이 조선에 전해진 두번의 사건이 있는데,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가 Lord Amherst호를 타고 조선에 들어와 한문성경을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1866년에 토마스 선교사가 미국 상선 General Sherman호로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순교하면서 한문성경을 나눠줬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은 여럿이 훗날 우리나라 교회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죽였던 박춘권은 그에게 받은 성경을 읽고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의 조카인 이영태가 훗날 레이놀즈 선교사와 성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때 성경 세권을 가져간 12살 소년 최치량이 박영식이라는 평양성 관리에게 그 성경을 주었습니다. 종이가 귀했던 때라 성경을 뜯어 벽에 도배를 했는데 벽에 붙은 그 성경을 읽다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조선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는 1907 영적 대각성 운동의 근원지였던 장대현 교회의 전신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성경이 번역될 때는 처음에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아닌 영어성경에서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국내가 아닌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리기 전이어서 가까운 중국에서 조선 선교를 위한 성경 번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John Ross 선교사가 조선인을 전도하고 그들과 함께 한글로 한자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낱권이 1882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여러 낱권 성경을 번역한 후 1887년에 신약을 완역해서 예수셩교전서를 출판합니다. 이 성경은 로스와 매킨타이어 등 서양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이 함께 번역을 했는데, 중국에 근거를 두다보니 그들이 북쪽 지역 사람들이라 말투가 서울말이 아닌 평안도 사투리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향해서 “입닷고 나오라”(막 1:25)라고 하신것으로 번역하는 식이었습니다.

 1884년과 1885년에는 일본에 있던 이수정이 한자성경에 우리말식 토를 달아서 읽을수 있도록 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번역이 나옵니다.

 그리고 1887년부터는 국내에서 선교사들의 번역으로 낱권 신약이 출판되다가 1900년에 신약 한글 완역인 '신약젼셔' 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911년에 구약젼셔가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이 개역성경 이전에 '구역'이라고 불리는 번역입니다. 이 구역을 개정해서 번역한 것이 1938년의 '성경개역' 입니다. 다시 개정한 것이 1961년의 '개역한글판' 성경입니다. 그리고 1998년에 '개역개정판' 성경이 나왔습니다. 어린시절 보았던 검은표지에 빨간색 옆면을 가진 세로쓰기 성경과 한자가 섞인 성경은 개역한글판 성경이었습니다.

 한글 성경 번역의 특징은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이 시작되었고, 이후 국내에서 번역되기 시작했으며, 신약성경부터 번역하고 이후 구약성경을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대한성서공회 번역

 대한성서공회는 대한민국에서 성서의 번역과 출판을 하는 재단법인 입니다. 1947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뿌리는 1895년 영국성서공회의 조선지부에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초기 국내 성서번역 작업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이후 1938년 조선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가 1940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다가 1947년 8월 19일에 대한성서공회로 설립되었습니다.

 구세군 대한본영,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한국루터회, 기독교한국침례회, 대한성공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의 교단이 함께하고 있는 한글성경의 공인 기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번역한 성경은 개역성경,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새번역 성경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해서 출간한 한글성경이 여럿 있습니다.(현대어 성경, 현대인의 성경, 쉬운성경 등) 그런데 왜 한글성경이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각 번역마다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한글 성경이라도 각 번역들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적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뒤집어 생각하면 여러 번역본들의 차이는 성경의 해석을 풍성하게 해주는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또 용도에 따라서 성경을 선택할 수 있는데, 한국교회가 대부분 예배용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성경은 말은 조금 어렵지만 운율이 있어서 낭독용으로 좋습니다. 통독용으로는 아무래도 이해가 쉬운 현대어로 된 번역이 좋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추천합니다. 한글을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청년이나 청소년들이 읽으려면 쉬운 성경 같은 번역을 추천합니다.


 저는 성서학을 전공한 목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내용이 그리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20년 가까이 목회 사역을 한 이민교회의 목사로 배우고 생각한 내용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한문성경을 전하는 선교사를 죽였던 한 사람이 그에게 받은 성경을 읽고 신자가 된 것처럼 성경에 대한 그 어떤 얘기들보다, 성경을 읽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성경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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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진리인가요?


 주일 예배 설교 중에 제목과 똑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듣고 있던 성도들 중 몇 분은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깜짝 놀랄 만큼 우리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생각은 확고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왜 우리가 사는 모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삶 같지도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 같지도 않을까요? 그렇게 중요하고 신성한 성경 말씀이라면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할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성경은 진리가 아닙니다"였습니다. 이거 이단 아닌가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진리입니다." 성경은 진리인 하나님의 뜻, 말씀을 담은 유일한 그릇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리라는 말과 진리를 담은 그릇이라는 것이 그말이 그말인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진리라면 성경은 어떤 오류나 모순도 없어야 합니다. 만약에 오류나 모순이 있다면 그 성경을 근거로 한 믿음은 무너지고 맙니다. 하지만 성경을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받아들인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오류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가치는 여전하게 됩니다.


 성경에 대해 말하는 성경 구절이 몇 군데 있습니다. 먼저 디모데후서 316절의 말씀이 유명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개역개정)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디모데가 성경을 배웠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구원 받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에 신약성경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모든 성경은 성경전서가 아니고 구약 성경입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신약 성경은 없었으니까요.

 보통 이 말씀은 성경이, 그것도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으니 완전하다는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는 진리를 깨닫고 성도들을 가르치는데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또 마태복음 518절의 말씀도 중요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개역개정)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더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성경'이 아닌 '율법'입니다. 물론 이 율법을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말로 볼수도 있습니다. 율법을 구약성경이라고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현실적으로 구약성경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MT)이 있고, 예수님 당시에는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LXX)도 있었습니다.(많은 신약의 구약 인용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닌 70인역 성경을 사용합니다.) 또 여러 사본상의 차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경의 문자들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것 같습니다.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글자들이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전하고자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 진리이며 그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책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담는 그릇'이라는 말로도 제목의 질문에 답이 되겠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경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와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발견해야 할지 얘기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말로 표현되었다는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게도 합니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도 말하는 의도와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훌륭하고 강력한 의사소통의 도구지만 또 한편으로 오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완벽한 말로 표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래서 한 성경을 가지고 여러 해석도 생기고 이단도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언어의 표현 능력이 진리를 완전하게 표현하기에 부족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 불안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언어로 표현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성경 자체가 진리라면 곤란한 점이 많아집니다. 불완전한 진리는 진리가 아니니까요.


성경은 글로 기록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말로 표현되었다'는 내용과 같은것 같지만 ''은 사람이 입으로 표현하는 음성언어이고 ''은 글씨로 쓰는 문자 언어를 가리킵니다. 문자로 쓰여졌기 때문에 기록물로 시간을 초월해 객관적인 매체로 남아있게 됩니다.

 글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이 말보다 내용을 더욱 구체적이고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더욱 구체적이며 기록으로 남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 되지만 표현이 구체적이고 강력해지는 만큼 반대로 의미의 풍성함은 잃게됩니다. 말로 표현할 때의 다양하고 풍성한 느낌과 감정은 줄어듭니다. 저자 직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눈 앞에서 그 표정을 보면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듣는 것과 그 장면을 기록한 복음서의 내용을 읽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이 또한 강력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문자로 기록된 성경 그 자체가 가지는 한계로 인해서 진리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필사되었습니다

 성경은 원본이 없습니다. 원어 성경이라고 해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사본들입니다. 처음 기록된 원본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사본 중의 하나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또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로 해서 그런 순수한 원본은 없다고 봅니다.

 사본은 손으로 베껴쓴 복제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본들이 다 똑같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실수로 틀릴 수도 있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과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다른 내용들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차이가 성경의 중요한 내용들을 손상시킬 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용과 형태가 다른 사본들이 많아서 원본을 알수 없는 성경이 진리라면 그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번역되었습니다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만약에 원어 성경의 사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원본 성경을 복원한다해도 한글이나 영어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는 것처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자기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봐야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원본의 의미와 뜻을 그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번역은 곧 오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어떤 언어도 1:1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번역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잘 옮겨도 비슷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번역성경을 가지고 ."일점일획도 변함 없는 말씀"을 생각하는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번역이 완벽하다면 언어마다 여러가지 번역본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번역이 불완전하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번역성경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경 자체가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진리라고 한다면 모든 번역본이 진리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어떤 특정한 번역본만 진리라는 건가요? 그러면 번역성경은 진리가 아니고 원어성경만 진리인가요? 이런 질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에 말로 표현되고, 다음에 문자로 기록되고, 번역까지 거쳤음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완벽하게 전해진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불안 요소가 있는데 사람이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완벽하다해도 성경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누군가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삶이 구원으로 가야 의미가 있는데, 이 과정이 그야말로 결정적으로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다르고 이해와 해석의 근거가 되는 경험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도 문제지만 성경말씀을 오해한 예도 너무나 많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얼른 생각나는 것만 해도 흑인을 가나안의 후손(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이라고 노예제도를 정당화했던 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며 여성을 무시했던 성차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유태인을 학살 했던 일 등이 모두 성경적인 근거로 정당화했던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역사상에도 그리고 개인의 일상에도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실 이런 예들은 성경을 오해했다기보다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불완전한 성경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성경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나요? 우선 당연하게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경전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자체가 진리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진리의 그릇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감동'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을 변화시켜 그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4:12, 새번역)


 이 성경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사람을 살리는 생명력 입니다. 우주의 법칙과 자연의 신비 속에서도 하나님을 알수 있지만 문서로 기록되고 기독교 공동체의 경전으로 형성된 것은 성경 뿐입니다.


 얼마 전에 모교단의 어떤 교수께서 감리교의 창시자 John Wesley의 신학을 이단적이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뒤에 쓰는 내용이 그에 대한 답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목으로 달아놓은 '성경이 진리인가?'에 대한 대답인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진리'라는 말을 John Wesley의 신학의 틀인 '웨슬리안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그것은 감리교 신학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기준인 '성서, 전통, 이성, 경험'입니다. 이것이 웨슬리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영국 성공회의 '성서, 전통, 이성' 세 가지 기준에 '경험'을 추가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틀로 하나님의 말씀, 뜻인 진리를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지만 벌써 진리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웨슬리안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아는 웨슬리의 방법을 학자들이 정리한 것입니다. '성서'를 통해서 교회 역사의 '전통'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삶의 '경험'에서 얻어진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고 앞에서 말한대로 불완전한 그릇이라면, 그 성경 안에 계시돼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웨슬리의 방법은 성경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검토하고 이해하며 경험을 통해서 더욱 삶에 다가오도록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기독교 신앙의 살아 있는 핵심은 성서 안에 계시 되었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었고, 개인적 경험에서 생기를 얻었고, 이성에 의하여 확고해졌다고 믿었다."(United Methodist Church, The Book of Discipline)


성서

 왜 성경이 아니고 성서라고 할까요? 성경이라고 하면 거룩한 경전이라는 뜻이고 성서라고 하면 거룩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더 경건한 것 같기도 하고 성서라는 용어는 객관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만,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성경과 성서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경전을 뜻하는 일반명사입니다. 불교에서도 '성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경이라는 용어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전통의 영향이 있고, 성서라는 용어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전통의 영향이 있습니다. 한글성경이 처음 번역될 때도 각각 중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번역되어 들어왔습니다. 두 용어의 의미상 차이는 없습니다.


 성서는 기독교 교리를 위한 일차적인 출처요 기준입니다. 일차적이라는 말은 교리와 신학 형성에 있어서 성서가 전통, 이성, 경험 보다 우선하는 표준이라는 말입니다. 성서가 진리를 담은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전통, 이성, 경험이 신앙적인지 이해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표준이 되고 반대로 다른 3가지 요소는 성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이차적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서가 한 책으로 형성되는데 각 책의 저자에게 있었던 성령의 감동이 있었고, 구약성경이 형성되는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신약성경의 고백들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전통

 기독교의 신앙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백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고백한 기독교가 형성한 신앙은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많은 이단 사상의 도전에 대해 성서적 교리와 신학을 세우면서 형성되었습니다. 또 개신교는 '오직 성서 sola scriptura'를 외치며 신앙의 기본을 세웠는데, 그런 반면 카톨릭은 신약성경을 형성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교리와 신학적인 흐름들은 교회의 역사인 전통 안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성서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전통에도 좋은 전통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현대교회 안에 남아서 생명력을 발하는 좋은 전통이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성

 이성은 합리와 과학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 역시 완전하지 않지만 진리를 아는데 쓸 수 있는 좋은 선물입니다. 특히 성경을 읽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도구입니다.

 이성이 진리를 아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수는 없습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전적인 믿음, 즉 인간 사회의 발달이 지상에 낙원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진작에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감리교인의 신앙은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성적인 것이 곧 신앙적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이성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IS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테러 집단인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이성이 하나님을 알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경험

 말로 배우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체득하는 방법은 배우고 이해한 바를 살면서 행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그 순간 그의 믿음은 완성되었고, 바울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데 열정을 쏟을 때 주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  또 사람들이 비슷하게 공유하는 경험을 가질 때 그것을 통해서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경험들로 이야기를 만들어 전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의 비유들입니다.

 글로 읽고, 말로 설명하고, 머리로 이해한 다음에 삶의 순간에 그 진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뜻은 내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도 잘 모르겠던 일들도 경험을 통해서 깊이 있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삶의 경험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고 표현합니다.

웨슬리는 이성을 통해서 신앙을 객관화했고, 경험을 중요하게 여김으로 주관적으로 성경을 나와 관계 있는 살아 있는 믿음으로 해석하게 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으로 유명한 Aldersgate의 체험이 웨슬리가 주님을 만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미국 선교에 열매를 얻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후 Moravian의 영향을 받고 신앙적인 고심을 하던 중 올더스게잇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합니다. 별로 사모하는 마음 없이 참석한 집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 체험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가 됩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신앙의 틀이 되는 경험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경험이 아니라 이처럼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체험을 말합니다.


 존 웨슬리는 죽음을 앞두고 감리회가 교단이 되어서 형식적이고 편협한 신앙을 갖게 될까 염려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감리교회가 웨슬리가 걱정하던 모습이 돼버린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웨슬리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리교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웨슬리안이라고 하는 여러 교단들에 그의 좋은 신앙적인 자산이 살아 있습니다.

 성경이 진리다 아니다하는 논쟁을 할수도 있습니다. 또 웨슬리의 신학이 좋다 아니다를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들의 인생에 실현되어서 천국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캘거리에서 그 길을 꿈꾸며 기도하고 목회하는 한 감리교 목사 고백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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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개인


이경민 목사

캘거리제일감리교회


 종교든 사회든 사람의 일입니다. 종교는 초월적이라 신을 말하는 듯 하지만 사람에 대한 것이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결국 종교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를 위한 것입니다.

 개인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 Individual을 번역한 말입니다. Individual은 영어 Indivisible에서 파생된 낱말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수를 뜻합니다. 요즘은 개인이 아주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문화적인 차이로 생각되는데,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에서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서양 문화가 개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동양 문화에서는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좀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개인이란 실제로는 '나'입니다. 나는 나 외에 다른 개인을 다룰 수 없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개인이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인 나에게 종교는 절대가치를 형성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종교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집단적이 되면 그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가 아닌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 또 어떤 집단의 공유된 가치체계가 종교처럼 작용합니다. 그렇게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처럼 가치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유사종교’라고 합니다.(예를 들면 특정 정치인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의 경우 종교와 비슷하게 집단을 형성하고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가치를 공유합니다. *종교사회학에서는 유사 종교라는 용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상적인 종교가 아닌 사이비 종교 등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존엄성

 세상이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대우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권력자와 영웅이 중요하고 보통 사람들은 그저 군중일 뿐이었습니다. 고등 종교가 태동하고 발전하던 시대조차도 개인으로서 인간이 중요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신에게서 부여 받은(이렇게 말하지만 실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권위로 사람들을 다스리던 왕은 신의 아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왕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때에 하나님 유일신 신앙을 가진 민족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신적 권위에 의해서 약하고 억눌리던 개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보호 받는 삶을 그렸던 것입니다.

 개인인 인간 한명 한명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은 세상에 없던 생각입니다. 종교를 통해서(다른 종교는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를 통해서)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그 개인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흐름이 있은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에서 보장하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말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상식이지만, 슬프게도 그 상식이 실제 세상에서는 참 무기력합니다. 세상은 힘(물리력이 아니라 여러가지 형태의 현대적인 권력)이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억누르고 착취합니다. 참으로 징그럽게도 바뀌지 않는 현실입니다. 차별이 상식인 삶은 사람들을 비참하고 슬프게 합니다.


차별에 대한 반대

 인간이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은 곧 개인에게 고난을 주는 차별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순기능이라면, 종교 자체가 기득권이 되어서 종교 특권층 이외의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역기능이겠죠. 종교에서 특히 기독교에서 걷어져야 하는 부분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핵심에 마틴 루터킹 주니어 목사가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에 근거한 차별 반대 운동은 절대가치에서 나온 행동이었기에 위협이나 박해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전래 초기 조선의 신분과 성차별 타파에 앞장선 것도 기독교였습니다. 물론 기독교나 다른 종교가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한 경우는 더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 살아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근본적인 고백을 생각하면 사람의 편견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걷어내야 할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박해 받는 소수의 위치에 있을 때는 순기능이 컸고, 교회가 기득권을 갖게 되면 역기능이 드러났습니다. 지금은 교회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순기능을 하는 면도 있고, 역기능이 드러나는 면도 있다고 봅니다. 많은 예들을 들 수 있겠지만, 그것을 일일이 지적하느니 보이는 부분들을 고치고 바꿔서 종교로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회복하는데 힘을 쏟는게 낫겠습니다.

 인종차별, 성차별, 소수 약자들이 온갖 차별아래 신음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의 차별들을 찾아 고쳐가고 세상을 향해 차별의 벽을 걷어내도록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내가 왜 죄인이야?

 기독교는 인간 존재를 '죄인'이라는 말로 규정합니다. 이 말이 익숙하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익숙하지 않으면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왜 죄인이라고 하나?'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유명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권위를 느끼고서는 그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 5:8 새번역)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그런 느낌의 죄인이라면 좀 이해가 될까요? 또 다른 면으로 설명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잘못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이 구원 받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할 때,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연약하고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고백이며,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에 의지해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한다고 기분 나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초대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 뿐 아니라 기독교에서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바울도 스스로 자신이 '죄인의 우두머리'(디모데전서 1:15 새번역)라고 했거든요.


종교와 윤리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은 1905년에 독일의 경제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년 4월 21일~1920년 6월 14일)의 저작인데, 그 내용이 개신교의 영향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기술이 정신을 지배한다고 생각 합니다. 기술 발전과 그로 인한 환경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인데, 그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막스 베버가 관찰한 예처럼 정신적인 부분의 변화가 사회를 새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술이 끼치는 영향력이 더 크지만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은 더 중요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종교는 사람에게 절대가치를 형성하고 삶의 의미를 규정하기 때문에 어떤 종교든 그 종교에 독실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직접적으로 규정합니다. 종교가 형성하는 가치판단을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 윤리가 인류에게 좋은 선물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겠지요. 건강한 종교는 건전한 윤리를 만들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윤리를 만드는 종교는 ‘이단’(異端 다를 이, 끝 단)이나 사이비 종교(似而非宗敎, 비슷한데 아닌)라고 평가 받습니다.

 죄의 삶의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삶을 살라는 기독교는 어떤 윤리를 내놓고 있나요? 기독교가 복음의 본질에 적절한 윤리를 제시하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나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종교 宗敎’는 한자말입니다. ‘마루 종’, ‘가르칠 교’입니다. 종宗자의 뜻은 근원이나 으뜸입니다. 풀어 말하면 세상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 그래서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주제로 한다는 말이죠. 가장 중요한 주제란 무엇일까요? 저는 초월적이고 놀랍고 광대한 무엇이라기 보다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움직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말하고, 그래서 그에 맞게 제대로 잘 살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죠. 기독교가 그 역할을 잘 한다면 건강한 종교로 인류와 함께 지속될 것이고,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역사 속에 있었던 종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종교도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갑니다. 발전하고 변화합니다. 본질은 더 갈고 닦아 사람들의 삶을 잘 인도하고, 그 외적인 부분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대응하여 변화해야 합니다. 본질이 아닌 부분을 본질이라고 붙들고 지난 시대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기독교는 사람들에게보다 먼저 하나님에게 버려져 폐기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일까봐 두렵습니다. 제가 그런 목사일까봐 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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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회


캘거리제일감리교회 이경민 목사


 저는 대학원에서 종교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탁월한 학문성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세상과 교회를 보는 시각은 좀 남다르고 싶고, 약간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져서 이번은 ‘종교와 사회’라는 주제로 쓰고 두 번째는 ‘종교와 인간’이라는 주제로 쓰겠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세상을 살면서, 사회적인 인간이 되는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종교는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시작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고, 자연은 왜 이렇게 인간을 괴롭히는지, 나쁜 사람들이 왜 잘 사는지, 사람은 왜 죽는지, 죽은 후엔 어떻게 되는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많이 밝혀지면서 종교가 답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만이 답할 수 있는 부분, 종교의 본질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종교 자체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권력이었습니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교와 사회는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는 영적인 면을 담당하고, 사회는 삶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종교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권력인 사회도 있습니다. 역사와 함께 종교와 사회가 분리됐다는 관점에서 보면 원시적 사회 구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한국과 캐나다는 종교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분리되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종교는 사람들의 생각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고, 반대로 세상의 현실들은 종교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종교적이며, 동시에 세상을 살고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상식

 종교의 기준은 '진리'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상식'입니다. 진리와 상식은 겹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면은 진리가 상식을 초월하고, 또 상식은 진리에 비해 영향력의 범위가 넓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고, 상식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진리는 타협이나 수정이 불가한 것이지만, 진리와 상식이 부딪히면 상식을 따라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는 언제나 옳은 것이기에 상식과 부딪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상식이 부딪히는 일이 있다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것이거나, 상식이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대체로 상식이 틀리는 경우 보다는 본질이 아닌 것을 진리의 본질이라고 고집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늘 옳은 것이요, 상식은 시대와 지식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것이라는 정의와는 상반되는 현실의 현상입니다. 종교가 진리 외적인 부분을 자꾸 진리라고 우기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전과 법전

 종교의 기준이 되는 문서를 '경전 Canon'이라고 합니다. 캐논은 카메라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길이를 재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기준이라는 말이죠.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 불교의 경전은 불경입니다. 상식의 경전이 있다면 '법전'일 것입니다. 그 시대 그 사회의 상식을 기준으로 한 옳고 그름을 근거로 법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통해서 진리를 알고, 법전을 통해서 세상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세상이 법의 정신이 지향하는대로 돌아가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법은 법이고 세상 살이와는 좀 차이가 있죠. 그 차이가 작은 사회는 선진 사회고 그 차이가 크면 후진 사회일 것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삶의 터전 캐나다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이 법대로 돌아가지 않듯, 종교의 경전을 따라서 제대로 사는 종교인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게 참 어렵습니다. 제가 목사인 만큼 교회를 생각하면 참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개독'이라는 말이 있다는 점이 그 증거입니다. 참 슬픈 단어입니다.


계약

 종교(기독교)와 사회 둘 다 계약이라는 말을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농담으로 ‘구원받는 약’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은 병을 낫게하는 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계약이라는 의미입니다. 옛 계약과 새 계약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약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 복이 있다는게 구약이고, 스스로는 구원 받을 길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것이 신약의 내용입니다. 기독교의 계약은 하나님이 인간을 살리기 위한 계약입니다.

 사회학자들은 계약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자연 상태로 살던 인간에서 계약에 의해서 사회제도들이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순진하고 순수한 발상이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중요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서 사회를 형성하고 어떤 형태든 계약에 의해서 권력이 형성되고 발전해 왔다는 생각입니다. 계약의 당사자인 권력자와 개인들이 무엇을 주고 받는지의 문제가 정치입니다. 개인은 자유와 노동력과 재산을 희생해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체계 즉 국가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데, 현실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계약이 잘 지켜져서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은 참으로 이상적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계약을 통해 구원 받은 인생들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이상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성향

 제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논문을 쓸 때 주제로 삼고 싶어서 고민했던 것이 있는데, 어째서 같은 종교 안에서 사람들의 성향이 극과 극으로 달리 나타나는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 현상을 보면 교회 안에도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근본주의 등 수 많은 주의가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대선 결과를 종교별로 분석한 내용이 있어서 유심히 봤습니다. 종교마다 어느 정도 높은 비율을 보이는 후보는 있지만, 한 후보에게 표가 몰리지 않은 것이 이런 현상을 증명합니다.


19대 대선 종교별 통계(방송3사 출구조사 기준)


그런 고민 끝에 제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종교 이전에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더 막강한 무엇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성향은 종교와 관계 없이 나타나고 그래서 한 종교 안에서 신앙적인 성향도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차이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나 학력과도 무관하고 사회경제적 지위와도 무관해 보입니다. 지금 생각에는 바뀌기가 엄청 어려운 것으로 봐서 가지고 태어나는 선천적인 것이거나 한번 형성되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종교와 정치

 고대에는 종교가 곧 정치였습니다. 지금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 각각의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도 정치도 사람이 사는데 관계된 일이라 겹치기 마련입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목회자는 정치 얘기 할 것 없고, 정치는 종교를 건들지 말라는 겁니다. 요즘엔 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정치적 지향을 드러내는 종교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저는 정교분리에 동의하는데, 서로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가 아니라,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면 안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모든 시대마다 정치는 종교를 통치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나라의 종교를 바꾸고 새 종교에게 힘을 주고 국민 통합과 권력 강화의 논리를 생산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합니다. 종교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지만, 종교인은 동시에 사회 구성원 개인으로 정치 활동을 해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13장 1절에서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이유는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정부와 권력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정부가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고민입니다.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이니 따라야 하는데,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에 있는 권세'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권력을 가진 것이 누군가? 그 답은 대통령이나 여당이 아니라 국민이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권력은 선거권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도 그 권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거로 권력을 다루고 조정해야 합니다. 


종교와 평화

 세상 모든 종교는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의 삶이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희한하게 그 종교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수많은 테러가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평화를 말하는 것이 종교인데, 사람에게 종교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절대 가치가 서로 다르면 갈등하고 원수가 되고 싸우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정교분리를 주장한 이유이기도 한데, 권력이 종교로 위장하고 종교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슬람을 표방하는 테러집단은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여러가지 필요와 욕망이 얽힌 테러리스트일 뿐입니다.

 건강한 종교라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원수 삼고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타문화권과의 접촉이 많지 않았기에 종교간의 갈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른 나라 타문화권의 타종교를 만나는 세상입니다. 캐나다에는 아마 세상의 웬만한 종교는 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편 나누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는 일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21세기에는 몇 가지 일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종교분쟁입니다. 명심합시다.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종교입니다.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종교는 문화현상이기도 합니다. 내 종교는 내 어머니 아버지처럼 바꿀수 없는 것이지만,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신앙도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답은 없고 이소리 했다가 저소리 했다가 했는데, 글의 한 조각이라도 읽어주신 여러분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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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피리눅스를 침실 컴퓨터에 설치하고 사용중입니다.
DVD로 부팅하고, 외장하드 하나 달아서 변경사항은 그쪽에 저장하는 상태로 쓰는데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침실 컴퓨터 용도는 TV 대용이라서 브라우저로 동영상 보고, 가끔 영화 파일을 재생해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직 퍼피리눅스 한글 입력 설정을 못해서(못하는 건지 안되는건지...)
가끔은 답답합니다.


지금까지는 대안으로 인터넷상에서 한글을 입력해주는 사이트에서 한글을 써서 복사해다가 붙이기로 해결했습니다.

(https://www.branah.com/korean)

이 방법도 제법 유용합니다. 작성한 후 바로 이메일로 보낼 수도 있고, 트윗도 할 수 있고 그런것 같습니다.

단점은... 귀찮다는 겁니다.

그래도 잘 쓰고 있었는데...


문득 예전에 설치해 놓았던 크롬 확장프로그램 한글 입력기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저 아이콘입니다. 설치해 놓고서 별로 쓸일이 없어 놔뒀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해봤습니다.


아이콘을 클릭하면 한글표시로 바뀝니다.

그리고 브라우저 입력창에 글을 써봤는데... 

세상에! 한글이 떡하니 써집니다.

이렇게 기쁜 일이 ㅋㅋ

되는 것만 확인한 상태지만 혹시 도움이 될분이 있을까해서 공유합니다.


설치하는 방법은 크롬브라우저(퍼피리눅스에서 기본으로 설치돼 있지는 않고, 퍼피 패키지 매니저에서 검색해서 설치하면 됩니다.)에서 확장프로그램 창을 열어서 korean IME검색해서 설치하면 될것 같습니다.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설치해둔지 일년도 넘은것 같아서요.



그리고 참고로 크롬 브라우저 로그인 해서 동기화 해주면 다른 컴퓨터에서도 확장프로그램과 저장된 아이디 비밀번호를 그대로 쓸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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