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무엇일까? 전쟁일까? 전염병일까? 사람에 의한 살인? 아니면 자살? 모두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바로 모기라고 한다. 모기에 물린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모기가 피를 빨 때 전염되는 병으로 죽은 숫자가 다른 요인보다 훨씬 많다. 현재도 연간 50만 명 정도가 모기가 옮긴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일본 뇌염, 말라리아, 황열, 뎅기열, 웨스트나일열, 치쿤구니야열, 지카 바이러스 감염증, 상피병 등 수 많은 질병이 모기에 의해서 전염된다.
 모기는 무서운 질병을 옮기는 것 외에도 여름이면 사람을 정말 불편하고 귀찮게 한다. 백해무익한 것 같은 모기가 싹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에 세상의 모든 모기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선 예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는 세계 인구의 증가다. 모기가 옮긴 병으로 사망하는 숫자가 죽지 않게 되니 인구가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모기가 옮기는 질병을 위해 각 나라에서 사용되는 비용이 필요 없게 되어서 다른 곳에 사용될 수 있다. 복지가 더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어쩌면 초콜릿이 사라질 수 있다. 초콜릿의 재료는 카카오인데, 모기가 카카오 나무의 꽃가루 수분을 한다. 모기가 이렇게 수분을 하는 식물은 카카오 외에도 많다. 수분이 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멸종하게 될 것이다. 또 모기 유충인 장구벌레가 사라지면 장구벌레를 먹는 새, 박쥐, 물고기, 개구리 등의 먹이 사슬 균형이 깨져서 심각한 생태계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
 순록의 이동 경로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는데, 모기가 순록 한 마리당 하루 평균 200mL의 피를 빨아 먹는다. 그래서 순록은 모기를 피하려고 바람을 거슬러 이동한다. 순록 떼의 이동 경로가 바뀌면 순록 떼가 지나가는 지역의 토양과 식물의 분포, 순록을 먹이로 하는 육식동물 분포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한다. 세상에서 모기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모기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이며, 어쩌면 인구 조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기가 있어서 좋은 점이 분명히 있다.

 새옹지마 이야기의 교훈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 보다는 좋은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낫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너무 신나 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것 보다 마음을 다스려서 침착하게 자기 길을 지키는 것이 좋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예전부터 인류를 고생 시켰다. 2003년 ‘사스’도, 2015년 ‘메르스’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것이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2019년에 감염이 시작돼서 ‘코로나 19’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이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등의 영향도 있었지만 인류의 생활 방식을 아주 짧은 시간에 바꿔 버렸다. 유행이 시작되고도 한참을 마스크를 거부하던 백인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은 잘 쓰고 다닌다. 인터넷으로 회의를 하거나 학교 수업을 하거나 교회 예배를 드리게 됐다. 온라인 쇼핑이 더욱 가속화되고 발전했다. 음식 배달 업계가 급부상 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유행이 인류 문명사의 변화를 10년 정도 앞당겼다는 말도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상상만 하던 일들이 이제 일상이 되었다.

 교회가 가장 치명타를 입었다. 예배를 중심으로, 모여서 예배하기에 열심이었던 교회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앞에서 모여서 예배하지 못하는, 그래서 힘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거나 아니면 모여서 예배하느라 세상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영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 년 반을 지나고 있는 팬데믹은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을 깊이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모여서 예배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인터넷을 통해 예배 드리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예배에 은혜가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앞으로 교회는 무엇을 힘써야 하는가? 화상 회의를 교회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현실적인 답들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는 자신이 진정한 믿음이 있었는가를 점검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나빠서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일이라도 좋은 부분은 꼭 있다. 또 반대로 세상에 좋기만 한 일도 없다. 좋은 일 같으나 인생을 망가뜨리는 시작이 되는 일도 있다.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일들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태도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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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은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은 인생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말을 제대로 하고 글을 제대로 쓰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적당히 대충 말하고 글을 쓰면 삶의 자세도 명확하지 않고 생각도 흐릿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말로 생각하고 말로 이해하고 그 틀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일에 대해서도 대충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적이다’, ‘믿음이 좋다’는 말이 바로 그런 중요한 말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신앙은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러면 ‘신앙적’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핵심만 말하면, ‘그 믿는 바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에서 ‘믿는 바’는 무엇인가요? 사도신경의 내용을 참고하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의 전능하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믿고, 성령이 나와 함께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믿는 것’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을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 내면의 작용이기에 사실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고, 그것으로 짐작할 수는 있지만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신앙적이라고 평가하고 또 어떤 생각에 대해서 그 생각은 신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믿음이 좋다’고 참 ‘신앙적’이라고 말하고 ‘신앙적인 자세는 이래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떨 때 그런 말을 하죠? 어떤 사람이 교회에 잘 다니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또 말을 할 때, 교회에서 많이 쓰는 교회 용어들과 은혜로운 표현들을 많이 하면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적이고 믿음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기분은 좋겠지만 그것이 진짜로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통해 주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성도님들께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남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자>

우리가 교회에서 쉽게 누군가를 신앙적이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이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앞에서 얘기한 대로 그것은 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남의 신앙을 판단하는 일이 내 신앙에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해를 끼칩니다.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믿음을 따라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나 자신을 돌아볼 때만 묻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 신앙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자>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믿음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정말 귀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평가를 사람에게서 구한다면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우리 마음 중에도 그런 생각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려고 노력하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만남을 갖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에 매일 힘쓰고, 깨닫고 알게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사는 길입니다. 하루 하루 이 일에 더욱 깊어져 가는 것이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COVID-19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힘들 때 성도들이 주님 닮은 모습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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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 목사

캘거리제일감리교회

 대부분의 종교는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전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Canon은 길이를 재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원 상 갈대라는 의미를 가진 말인데, 그 의미에서 길이를 재는 자, 척도, 기준의 의미가 나왔고, 그 말을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경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카메라 회사인 캐논이 영어 표기가 같은데, 카메라의 기준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기도 했지만 원래는 불교 용어인 '관음'을 뜻하는 일본어 발음인 '칸논' 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 기록되었고 또 오랜 시간의 역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기준으로 인정된 책들의 모음입니다. 인정이란 말은 그 안에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성경적'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적이라고 하면 진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말의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별로 성경적인 것 같지 않은 생각에 성경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을 사용하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만 하면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기준이 성경이므로 우리는 성도로 살면서 만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질문의 답을 직접적으로 주지 않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지금의 우리 세상과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정말 성경적인 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경 구절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단순하기 않기에 '성경적'이라는 말을 쉽게 쓸 일이 아닙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참 신앙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생각해 보니 ‘그게 과연 옳은 표현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는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서는 성경적이면 안됩니다. 신앙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은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치관'도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시는 것을 크게 보고, 하나님이 작게 보시는 것을 작게 보아야 합니다. '성경적 역사관'도 말이 됩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양하지만 신앙인이 역사를 보는 관점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이면 곤란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그렇습니다. 좋은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일까요? 성경의 내용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좁은 의미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고, 노래들도 있고 다양한 시대에 쓰인 다양한 문학 형태가 섞여 있습니다. 어떤 부분엔 아주 고대의 자연관, 우주관,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지금 우리도 성경에 있는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최신 연대는 언제일까요? 늦게 기록된 신약 성경이 기원후 1세기 전후의 글이라면 지금부터 2,000년 정도 이전의 글이고, 구약으로 가면 거기에 1,000년 이상을 더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교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있던 삼국 시대 초반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고대인의 세계관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말이라고 다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 그것을 담고 있어야 진짜 성경적인 것입니다. 성경적인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성경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성경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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