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진리인가요?


 주일 예배 설교 중에 제목과 똑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듣고 있던 성도들 중 몇 분은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깜짝 놀랄 만큼 우리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생각은 확고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왜 우리가 사는 모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삶 같지도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 같지도 않을까요? 그렇게 중요하고 신성한 성경 말씀이라면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할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성경은 진리가 아닙니다"였습니다. 이거 이단 아닌가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진리입니다." 성경은 진리인 하나님의 뜻, 말씀을 담은 유일한 그릇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리라는 말과 진리를 담은 그릇이라는 것이 그말이 그말인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진리라면 성경은 어떤 오류나 모순도 없어야 합니다. 만약에 오류나 모순이 있다면 그 성경을 근거로 한 믿음은 무너지고 맙니다. 하지만 성경을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받아들인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오류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가치는 여전하게 됩니다.


 성경에 대해 말하는 성경 구절이 몇 군데 있습니다. 먼저 디모데후서 316절의 말씀이 유명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개역개정)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디모데가 성경을 배웠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구원 받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에 신약성경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모든 성경은 성경전서가 아니고 구약 성경입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신약 성경은 없었으니까요.

 보통 이 말씀은 성경이, 그것도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으니 완전하다는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는 진리를 깨닫고 성도들을 가르치는데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또 마태복음 518절의 말씀도 중요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개역개정)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더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성경'이 아닌 '율법'입니다. 물론 이 율법을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말로 볼수도 있습니다. 율법을 구약성경이라고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현실적으로 구약성경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MT)이 있고, 예수님 당시에는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LXX)도 있었습니다.(많은 신약의 구약 인용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닌 70인역 성경을 사용합니다.) 또 여러 사본상의 차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경의 문자들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것 같습니다.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글자들이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전하고자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 진리이며 그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책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담는 그릇'이라는 말로도 제목의 질문에 답이 되겠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경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와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발견해야 할지 얘기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말로 표현되었다는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게도 합니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도 말하는 의도와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훌륭하고 강력한 의사소통의 도구지만 또 한편으로 오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완벽한 말로 표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래서 한 성경을 가지고 여러 해석도 생기고 이단도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언어의 표현 능력이 진리를 완전하게 표현하기에 부족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 불안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언어로 표현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성경 자체가 진리라면 곤란한 점이 많아집니다. 불완전한 진리는 진리가 아니니까요.


성경은 글로 기록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말로 표현되었다'는 내용과 같은것 같지만 ''은 사람이 입으로 표현하는 음성언어이고 ''은 글씨로 쓰는 문자 언어를 가리킵니다. 문자로 쓰여졌기 때문에 기록물로 시간을 초월해 객관적인 매체로 남아있게 됩니다.

 글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이 말보다 내용을 더욱 구체적이고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더욱 구체적이며 기록으로 남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 되지만 표현이 구체적이고 강력해지는 만큼 반대로 의미의 풍성함은 잃게됩니다. 말로 표현할 때의 다양하고 풍성한 느낌과 감정은 줄어듭니다. 저자 직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눈 앞에서 그 표정을 보면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듣는 것과 그 장면을 기록한 복음서의 내용을 읽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이 또한 강력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문자로 기록된 성경 그 자체가 가지는 한계로 인해서 진리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필사되었습니다

 성경은 원본이 없습니다. 원어 성경이라고 해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사본들입니다. 처음 기록된 원본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사본 중의 하나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또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로 해서 그런 순수한 원본은 없다고 봅니다.

 사본은 손으로 베껴쓴 복제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본들이 다 똑같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실수로 틀릴 수도 있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과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다른 내용들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차이가 성경의 중요한 내용들을 손상시킬 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용과 형태가 다른 사본들이 많아서 원본을 알수 없는 성경이 진리라면 그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번역되었습니다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만약에 원어 성경의 사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원본 성경을 복원한다해도 한글이나 영어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는 것처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자기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봐야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원본의 의미와 뜻을 그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번역은 곧 오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어떤 언어도 1:1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번역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잘 옮겨도 비슷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번역성경을 가지고 ."일점일획도 변함 없는 말씀"을 생각하는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번역이 완벽하다면 언어마다 여러가지 번역본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번역이 불완전하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번역성경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경 자체가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진리라고 한다면 모든 번역본이 진리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어떤 특정한 번역본만 진리라는 건가요? 그러면 번역성경은 진리가 아니고 원어성경만 진리인가요? 이런 질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에 말로 표현되고, 다음에 문자로 기록되고, 번역까지 거쳤음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완벽하게 전해진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불안 요소가 있는데 사람이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완벽하다해도 성경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누군가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삶이 구원으로 가야 의미가 있는데, 이 과정이 그야말로 결정적으로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다르고 이해와 해석의 근거가 되는 경험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도 문제지만 성경말씀을 오해한 예도 너무나 많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얼른 생각나는 것만 해도 흑인을 가나안의 후손(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이라고 노예제도를 정당화했던 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며 여성을 무시했던 성차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유태인을 학살 했던 일 등이 모두 성경적인 근거로 정당화했던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역사상에도 그리고 개인의 일상에도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실 이런 예들은 성경을 오해했다기보다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불완전한 성경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성경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나요? 우선 당연하게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경전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자체가 진리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진리의 그릇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감동'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을 변화시켜 그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4:12, 새번역)


 이 성경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사람을 살리는 생명력 입니다. 우주의 법칙과 자연의 신비 속에서도 하나님을 알수 있지만 문서로 기록되고 기독교 공동체의 경전으로 형성된 것은 성경 뿐입니다.


 얼마 전에 모교단의 어떤 교수께서 감리교의 창시자 John Wesley의 신학을 이단적이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뒤에 쓰는 내용이 그에 대한 답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목으로 달아놓은 '성경이 진리인가?'에 대한 대답인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진리'라는 말을 John Wesley의 신학의 틀인 '웨슬리안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그것은 감리교 신학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기준인 '성서, 전통, 이성, 경험'입니다. 이것이 웨슬리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영국 성공회의 '성서, 전통, 이성' 세 가지 기준에 '경험'을 추가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틀로 하나님의 말씀, 뜻인 진리를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지만 벌써 진리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웨슬리안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아는 웨슬리의 방법을 학자들이 정리한 것입니다. '성서'를 통해서 교회 역사의 '전통'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삶의 '경험'에서 얻어진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고 앞에서 말한대로 불완전한 그릇이라면, 그 성경 안에 계시돼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웨슬리의 방법은 성경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검토하고 이해하며 경험을 통해서 더욱 삶에 다가오도록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기독교 신앙의 살아 있는 핵심은 성서 안에 계시 되었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었고, 개인적 경험에서 생기를 얻었고, 이성에 의하여 확고해졌다고 믿었다."(United Methodist Church, The Book of Discipline)


성서

 왜 성경이 아니고 성서라고 할까요? 성경이라고 하면 거룩한 경전이라는 뜻이고 성서라고 하면 거룩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더 경건한 것 같기도 하고 성서라는 용어는 객관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만,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성경과 성서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경전을 뜻하는 일반명사입니다. 불교에서도 '성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경이라는 용어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전통의 영향이 있고, 성서라는 용어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전통의 영향이 있습니다. 한글성경이 처음 번역될 때도 각각 중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번역되어 들어왔습니다. 두 용어의 의미상 차이는 없습니다.


 성서는 기독교 교리를 위한 일차적인 출처요 기준입니다. 일차적이라는 말은 교리와 신학 형성에 있어서 성서가 전통, 이성, 경험 보다 우선하는 표준이라는 말입니다. 성서가 진리를 담은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전통, 이성, 경험이 신앙적인지 이해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표준이 되고 반대로 다른 3가지 요소는 성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이차적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서가 한 책으로 형성되는데 각 책의 저자에게 있었던 성령의 감동이 있었고, 구약성경이 형성되는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신약성경의 고백들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전통

 기독교의 신앙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백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고백한 기독교가 형성한 신앙은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많은 이단 사상의 도전에 대해 성서적 교리와 신학을 세우면서 형성되었습니다. 또 개신교는 '오직 성서 sola scriptura'를 외치며 신앙의 기본을 세웠는데, 그런 반면 카톨릭은 신약성경을 형성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교리와 신학적인 흐름들은 교회의 역사인 전통 안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성서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전통에도 좋은 전통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현대교회 안에 남아서 생명력을 발하는 좋은 전통이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성

 이성은 합리와 과학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 역시 완전하지 않지만 진리를 아는데 쓸 수 있는 좋은 선물입니다. 특히 성경을 읽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도구입니다.

 이성이 진리를 아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수는 없습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전적인 믿음, 즉 인간 사회의 발달이 지상에 낙원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진작에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감리교인의 신앙은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성적인 것이 곧 신앙적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이성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IS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테러 집단인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이성이 하나님을 알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경험

 말로 배우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체득하는 방법은 배우고 이해한 바를 살면서 행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그 순간 그의 믿음은 완성되었고, 바울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데 열정을 쏟을 때 주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  또 사람들이 비슷하게 공유하는 경험을 가질 때 그것을 통해서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경험들로 이야기를 만들어 전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의 비유들입니다.

 글로 읽고, 말로 설명하고, 머리로 이해한 다음에 삶의 순간에 그 진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뜻은 내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도 잘 모르겠던 일들도 경험을 통해서 깊이 있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삶의 경험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고 표현합니다.

웨슬리는 이성을 통해서 신앙을 객관화했고, 경험을 중요하게 여김으로 주관적으로 성경을 나와 관계 있는 살아 있는 믿음으로 해석하게 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으로 유명한 Aldersgate의 체험이 웨슬리가 주님을 만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미국 선교에 열매를 얻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후 Moravian의 영향을 받고 신앙적인 고심을 하던 중 올더스게잇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합니다. 별로 사모하는 마음 없이 참석한 집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 체험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가 됩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신앙의 틀이 되는 경험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경험이 아니라 이처럼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체험을 말합니다.


 존 웨슬리는 죽음을 앞두고 감리회가 교단이 되어서 형식적이고 편협한 신앙을 갖게 될까 염려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감리교회가 웨슬리가 걱정하던 모습이 돼버린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웨슬리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리교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웨슬리안이라고 하는 여러 교단들에 그의 좋은 신앙적인 자산이 살아 있습니다.

 성경이 진리다 아니다하는 논쟁을 할수도 있습니다. 또 웨슬리의 신학이 좋다 아니다를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들의 인생에 실현되어서 천국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캘거리에서 그 길을 꿈꾸며 기도하고 목회하는 한 감리교 목사 고백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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