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사회


캘거리제일감리교회 이경민 목사


 저는 대학원에서 종교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탁월한 학문성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세상과 교회를 보는 시각은 좀 남다르고 싶고, 약간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져서 이번은 ‘종교와 사회’라는 주제로 쓰고 두 번째는 ‘종교와 인간’이라는 주제로 쓰겠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세상을 살면서, 사회적인 인간이 되는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종교는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시작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고, 자연은 왜 이렇게 인간을 괴롭히는지, 나쁜 사람들이 왜 잘 사는지, 사람은 왜 죽는지, 죽은 후엔 어떻게 되는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많이 밝혀지면서 종교가 답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만이 답할 수 있는 부분, 종교의 본질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종교 자체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권력이었습니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교와 사회는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는 영적인 면을 담당하고, 사회는 삶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종교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권력인 사회도 있습니다. 역사와 함께 종교와 사회가 분리됐다는 관점에서 보면 원시적 사회 구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한국과 캐나다는 종교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분리되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종교는 사람들의 생각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고, 반대로 세상의 현실들은 종교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종교적이며, 동시에 세상을 살고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상식

 종교의 기준은 '진리'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상식'입니다. 진리와 상식은 겹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면은 진리가 상식을 초월하고, 또 상식은 진리에 비해 영향력의 범위가 넓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고, 상식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진리는 타협이나 수정이 불가한 것이지만, 진리와 상식이 부딪히면 상식을 따라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는 언제나 옳은 것이기에 상식과 부딪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상식이 부딪히는 일이 있다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것이거나, 상식이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대체로 상식이 틀리는 경우 보다는 본질이 아닌 것을 진리의 본질이라고 고집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늘 옳은 것이요, 상식은 시대와 지식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것이라는 정의와는 상반되는 현실의 현상입니다. 종교가 진리 외적인 부분을 자꾸 진리라고 우기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전과 법전

 종교의 기준이 되는 문서를 '경전 Canon'이라고 합니다. 캐논은 카메라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길이를 재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기준이라는 말이죠.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 불교의 경전은 불경입니다. 상식의 경전이 있다면 '법전'일 것입니다. 그 시대 그 사회의 상식을 기준으로 한 옳고 그름을 근거로 법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통해서 진리를 알고, 법전을 통해서 세상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세상이 법의 정신이 지향하는대로 돌아가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법은 법이고 세상 살이와는 좀 차이가 있죠. 그 차이가 작은 사회는 선진 사회고 그 차이가 크면 후진 사회일 것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삶의 터전 캐나다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이 법대로 돌아가지 않듯, 종교의 경전을 따라서 제대로 사는 종교인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게 참 어렵습니다. 제가 목사인 만큼 교회를 생각하면 참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개독'이라는 말이 있다는 점이 그 증거입니다. 참 슬픈 단어입니다.


계약

 종교(기독교)와 사회 둘 다 계약이라는 말을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농담으로 ‘구원받는 약’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은 병을 낫게하는 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계약이라는 의미입니다. 옛 계약과 새 계약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약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 복이 있다는게 구약이고, 스스로는 구원 받을 길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것이 신약의 내용입니다. 기독교의 계약은 하나님이 인간을 살리기 위한 계약입니다.

 사회학자들은 계약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자연 상태로 살던 인간에서 계약에 의해서 사회제도들이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순진하고 순수한 발상이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중요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서 사회를 형성하고 어떤 형태든 계약에 의해서 권력이 형성되고 발전해 왔다는 생각입니다. 계약의 당사자인 권력자와 개인들이 무엇을 주고 받는지의 문제가 정치입니다. 개인은 자유와 노동력과 재산을 희생해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체계 즉 국가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데, 현실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계약이 잘 지켜져서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은 참으로 이상적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계약을 통해 구원 받은 인생들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이상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성향

 제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논문을 쓸 때 주제로 삼고 싶어서 고민했던 것이 있는데, 어째서 같은 종교 안에서 사람들의 성향이 극과 극으로 달리 나타나는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 현상을 보면 교회 안에도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근본주의 등 수 많은 주의가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대선 결과를 종교별로 분석한 내용이 있어서 유심히 봤습니다. 종교마다 어느 정도 높은 비율을 보이는 후보는 있지만, 한 후보에게 표가 몰리지 않은 것이 이런 현상을 증명합니다.


19대 대선 종교별 통계(방송3사 출구조사 기준)


그런 고민 끝에 제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종교 이전에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더 막강한 무엇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성향은 종교와 관계 없이 나타나고 그래서 한 종교 안에서 신앙적인 성향도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차이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나 학력과도 무관하고 사회경제적 지위와도 무관해 보입니다. 지금 생각에는 바뀌기가 엄청 어려운 것으로 봐서 가지고 태어나는 선천적인 것이거나 한번 형성되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종교와 정치

 고대에는 종교가 곧 정치였습니다. 지금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 각각의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도 정치도 사람이 사는데 관계된 일이라 겹치기 마련입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목회자는 정치 얘기 할 것 없고, 정치는 종교를 건들지 말라는 겁니다. 요즘엔 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정치적 지향을 드러내는 종교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저는 정교분리에 동의하는데, 서로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가 아니라,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면 안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모든 시대마다 정치는 종교를 통치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나라의 종교를 바꾸고 새 종교에게 힘을 주고 국민 통합과 권력 강화의 논리를 생산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합니다. 종교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지만, 종교인은 동시에 사회 구성원 개인으로 정치 활동을 해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13장 1절에서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이유는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정부와 권력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정부가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고민입니다.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이니 따라야 하는데,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에 있는 권세'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권력을 가진 것이 누군가? 그 답은 대통령이나 여당이 아니라 국민이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권력은 선거권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도 그 권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거로 권력을 다루고 조정해야 합니다. 


종교와 평화

 세상 모든 종교는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의 삶이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희한하게 그 종교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수많은 테러가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평화를 말하는 것이 종교인데, 사람에게 종교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절대 가치가 서로 다르면 갈등하고 원수가 되고 싸우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정교분리를 주장한 이유이기도 한데, 권력이 종교로 위장하고 종교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슬람을 표방하는 테러집단은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여러가지 필요와 욕망이 얽힌 테러리스트일 뿐입니다.

 건강한 종교라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원수 삼고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타문화권과의 접촉이 많지 않았기에 종교간의 갈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른 나라 타문화권의 타종교를 만나는 세상입니다. 캐나다에는 아마 세상의 웬만한 종교는 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편 나누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는 일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21세기에는 몇 가지 일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종교분쟁입니다. 명심합시다.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종교입니다.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종교는 문화현상이기도 합니다. 내 종교는 내 어머니 아버지처럼 바꿀수 없는 것이지만,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신앙도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답은 없고 이소리 했다가 저소리 했다가 했는데, 글의 한 조각이라도 읽어주신 여러분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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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에 대해서


 나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그게 가능하다면 미래가 이미 미래가 아닌 현재 혹은 현재의 과거가 되고, 그렇게 시간은 뒤엉켜 버린다. 그런데 내 현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두번째 이유는 그게 가능하다면 세계 곳곳에서 시간 여행자들의 목격담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는 점이다.

세 번째 이유는 시간이란 경험하는 존재를 통해서만 인식되는 것인데, 그 경험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과거는 지나가 기억이 돼 버렸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 현재 밖에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다차원적 시간이 있다는 생각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혀 과학적 지식도 없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근거와 결론이지만,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맞는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진실은 얼마든지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재미있게 본다. 그 소재 자체가 참 매력적이다. 미래에 가서 나의 미래 모습을 확인하고, 과거로 가서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참 흥미롭다. 시간여행 기술을 나 혼자만 독점할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시간여행물은 그렇게 즐기면서도 시간여행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모순인가 아닌가?', '사실 영화나 드라마의 많은 부분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즐겁지 않은가?'하는 생각도 든다.


 시간여행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다가 시간여행 소재를 소비하는 인간의 심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굳이 과거로 가지 않아도 기억 속에 바꾸고 싶고 후회하는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 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이런 것 말이다. 후회는 실수를 수정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한다. 하지만 과거로 가서 그 때 그 실수만 살짝 수정해서 지금을 좋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대머리를 부르는, 참 쉽게 살고 싶은 생각이다. 공짜로 과거의 실수가 고쳐지기를 바라는 도둑 심보다.


 사람은 과거로 가지 않아도 이전에 현재였던 시간 속에서 여러번 반복한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배움을 지금 현재에 적용해서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비슷비슷한 경험을 반복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매일 매일의 경험 속에서 깨닫고 배우고 성장하지 못한다면 헛사는 인생이 아닐까? 몸이 늙어서 소멸을 향해 갈 뿐 매일 매일 한치의 자람도 없는 갖혀버린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말이 쉽지, 경험에서 좋은 답을 얻어내어 중요한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은 것을 삶에 적용하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간여행물에서는 과거를 바꾸면 현재가 바뀐다고 설정한다. 그리고 과거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바꾸면 그로 인해 큰 변화가 나타나거나 그 일로 인한 혼란이 야기된다. 과거로 가서 현재를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날로 먹으려는 도둑 심보를 빼고, 과거를 현재로, 현재를 미래로 바꾸면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경험을 통해 배우고 그 배움을 현재에 적용해서 미래를 바꾸는 일은 무척이나 에너지가 많이 들지만 꼭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점이다.

역사를 통해 배움을 얻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일이, 말로는 쉬운데, 행하기가 그리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에서나 한 사회의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일이다.





* Legend of Tomorrow(시간여행 미드)와 '시그널'을 같이 보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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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 살 때 보다 우리나라를 더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국내에서 살 때 하고는 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러가지가 그런데, 요즘 우리말에 대한 호칭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언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말과 글이다. 우리나라는 우리만의 말과 우리만의 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는 이 사실이 실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말만 있고 문자가 없는 언어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구가 적거나 다른 이유로 다른 언어권으로 흡수되서 사라지는 말도 많다.


우리말에 대한 호칭 중에 글에 대한 호칭은 비교적 명확하다.

그 기원이 확실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름은 '훈민정음'이고, 일반적으로는 '한글' 영문 표기로는 'Hangul'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글이라고 하면 별로 문제가 없다. 외국인에게 말할 때는 '한글'이라고 하거나 못 알아들으면 'Korean Letter'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말에 대한 호칭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보통 '한국어', '한국말', '국어'라고 부른다. 그중 '한국어'라고 많이 부르는 것 같다.

문제로 생각되는 부분이 여기다. 우리말은 '한국어'라고만 말할 수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 대한민국에서만 사용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을 생각하면, 북에서는 '조선어'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 뿐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고려, 삼국시대 그리고 그 이전에도 사용했을 말이다. 현대에도 한국 국적의 사람들 뿐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도 더 멀리 고려인들도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말을 한국어라고 말하는 것은 현대의 한국(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나라라는 교만이다.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 대안이 무엇인가? 이런 호칭에 대한 문제 제기에 답이 되고, 거부감도 별로 없는 단어는 무엇인가?


이 글의 처음부터 '우리말'이라는 표현을 썼다. 거부감이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한국어'라는 명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대안으로 '우리말'이라는 명칭을 제안한다. 얼핏보면 '우리말'이라는 명칭은 애매한 것 같다. 어느 나라 말은 우리 말이 아닌가?하지만 한글로 쓰여진, 그리고 우리말로 표현된 '우리말'이라는 명칭은 우리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우리말로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지 않는가?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친구

나는 친구가 있다. 아는 사람은 좀 되지만 친구는 몇 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래왔다. 며칠 전 문득 친구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장면마다 함께했던 소중한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내게는 때 마다 가장 친한 친구 한명이 있었다. 어린시절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사춘기 시절에도, 대학에 갔을 때도, 군 생활을 할 때도 꼭 한명의 친한 친구가 있었고 가정을 이룬 지금은 아내가 가장 친한 친구다.

새로운 환경에 처할 때면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그리 좋지 않은 나는, 한 명 이상의 친구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저 내 성격 탓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나와 참 많이 다른 친구를 생각하게 되었다. 친해질 때는 분명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친해졌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을 가진 친구였다. 그 사실을 한참이 지난 지금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이 이어졌다. 그 친구는 나의 반대편에 있었고, 그래서 그 친구를 통해서 나의 치우침에 조금이나마 균형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생각해놓고나니, 때때마다 만났던 친구들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춘기 시절 내 친구는 조숙하고 진지한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진지한 신앙을 배웠고 내게 없었던 정서들을 배웠다. 또 다른 친구를 통해서 장애인을 보았고, 궁핍을 보았고, 당당함을 배웠다. 그 다음 친구는 철들지 않는 나에게 형처럼 인생의 무서움을 알려주었다. 군에 가서 만난 친구는 나이만 먹었지 어리숙한 나를 돌봐주었고, 군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의지가 돼 주었다. 아내와의 만남은 세상 반쪽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에게 다른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주었고 나를 극복하고, 조금이나마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다.

지금은 목회의 자리, 사명의 장에서 같은 길을 가는 동역자들이 친구가 된다. 어떤 친구에게는 열정을 배우고, 어떤 친구에게는 지식을 배우고, 어떤 친구의 신실함에 감탄하며 내 자신을 키워나가고 있다.


돌아보면 나는 참 내놓을만한 무엇 하나 가진게 없다. 그 어떤 부분에도 천재성은 당연히 없고, 열정도, 노력도, 신실함도, 하여튼 기준에 못미치는 사람이다. 그래도 애써서 좋은 점 하나를 찾아보자면, 좋은 친구에게 좋은 점을 배우려는 자세가 있다고나 할까? 그것도 예민하게 깨닫고 배우지 못하는 둔한 처지이지만, 내게 좋은 친구들을 늘 보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행복하려면 버려야 하는 것들이랍니다. 

1. 항상 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2. 비난 
3. 자괴감 
4.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려는 욕망 
5. 변화에 대한 저항 
6. 공포 
7. 핑계 
8. 다른 사람의 기대에 따라 살기 
9. 과거 
10. 불평 

 -12월 더 브릿지 중에서 

 항상 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어쩌면 그 이전에 내 생각이 맞고 다른 생각은 틀리다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건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전혀 다른 감정적 이유때문에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난? 
  남을 비난하지 말라는 말인듯 하다. 
 남을 향해 비난은 물론 비판도 할 일이 없다. 
 다른 이의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면 그 기준을 돌려 나 자신을 살필일이다. 

 자괴감?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려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감정'이라고 표현하는데... 
인간존재의 본질은 비참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 마음이 교만하지 않은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적인 자세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려는 욕망?
 음...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러니 서로 갈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건 참 나쁜 마음이다. 
자신 스스로 잘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려고 노력해도 그게 될까말까인데...
그리고 영향력은 자신이 온전해지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자, 내게 누구든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맞게 하려는 욕구가 있는가? 
내려놓자.

 변화에 대한 저항?
 모든것은 변한다. 
변화의 방향과 내용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태도이다. 
그것에 따라서 그 변화는 내용에 관계없이 불만거리가 될 수도 혁신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 

 공포?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 
불안함이 있으니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이 없으니 불안한 것도 당연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사람들은 그렇기에 믿을만한 것이 아닌 대상에 의지하려고 한다. 
재산이나 능력이나, 사람이나, 미신적인 의지 등... 그런건 아니다.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 온전한 삶을 사는 길이요 믿음의 길이다. 

 핑계?
 핑계는 자신을 나약하게 만들고, 그 수준에 머무르게 만들며, 퇴보하게 한다. 
그렇게 살고 싶으면 핑계를 찾는 능력을 길러라. 
그렇지 않으면 그 노력을 긍정적인 변화에 투자하라. 

 다른 사람의 기대에 따라 살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그것에 맞추려고 살아왔는가... 
이것은 마치 유행하는 유명 브랜드의 옷이나 신발을 사려고 고민하는 사춘기 수준의 삶이다. 
따라서 살아갈 만한 기준이나 중심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왜 그것이 없는가? 
하나님의 뜻, 이것만이 내가 따라가야할 길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갈 길을 가자.

 과거를 버리라... 
 현재를 괴롭게 하고 미래를 제한하는 부정적인 과거와 기억을 버려야 하는거 아닐까? 
죄의식이나 자기 비하나 뭐 그런것들...

 불평을 버리라. 
맞다. 불평은 불편한 상황을 전혀 개선하지 못한다. 
내 입을 싸게 만들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다. 
불편하면 개선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라. 
감사야말로 믿는 사람들의 특별한 능력이다. 

 - 내 생각 ^^



링크주소

http://podcastfile.imbc.com/cgi-bin/podcast.fcgi/podcast/changeworld/changeworld_2012090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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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등이 너무 가려운데 손이 닿지 않아서 괴로울때가 있다.

그럴 때 긁어달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등은 가렵고 맘은 외롭고

참 웃기고 슬프겠다.


우리 아이들은 밤마다 재울라 치면 등을 긁어달라 내민다.

아내가 어렸을 때 그랬다는데...

나는 기억이 없다.

안했다는게 아니라, 기억나지 않는다.


언젠가 내가 "아 등 간지러워~' 그랬더니 아들녀석이 이런다.

'에이 그건 간지러운게 아니죠, 가려운거죠~'

뭐지? 이 기분은...

나는 이 나이 먹도록 '간지럽다'와 '가렵다'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듣고 보니 그렇다. 간지러운건 간지럽혀서 느끼는 감각이고

가려운건 안 간지럽혔는데 그냥 긁고 싶은거니까.

가려운 것과 간지러운 감각을 생각해보니 비슷한것 같지만 다르다.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그렇다.

다시 한번 드는 생각 '이거 머지?'

이 녀석은 영어 배우기도 바쁠텐데 어디서 이런걸 알았지?

다음엔 내가 어려운걸로 한번 눌러줘야겠다.


다음은 네이버 사전 검색 결과다. 비슷한 부분도 있고 다른 의미도 있고, 유의어에 서로 나와있기도 하다.

가렵다[가렵따]

[형용사]

  • 1.피부에 긁고 싶은 느낌이 있다.
  • 2.못 견딜 정도로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하고 싶은 느낌이 있다.

간지럽다[간지럽따]

[형용사]

  • 1.무엇이 살에 닿아 가볍게 스칠 때처럼 견디기 어렵게 자리자리한 느낌이 있다.
  • 2.어떤 일을 하고 싶어 참고 견디기 어렵다.
  • 3.몹시 어색하거나 거북하거나 더럽고 치사하여 마음에 자리자리한 느낌이 있다.


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고민이 하나 있다.

왜 한 종교 안에서 극과 극의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성향들이 나타나는가?

사는 모습이나 사고방식에서 타종교인보다 성향이 다른 기독교인이 더 멀게느껴지는 현상은 왜 나타나는가?


어렸을때는 교회 다니는 사람, 기독교인은 다 나처럼 생각하고 성향이 같을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만나게 된 현실은 달랐다. 교회 안에는 정말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극과극이 함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치는데 신앙보다 우선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게 무엇일까? 기질과 성격? 경제적 계급, 정치적 성향... 저것들 다 포함하고 더 많은 무엇들이 있을것이다. 그런 요소들은 한결같이 타고난것이거나 물질적인 것이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개신교윤리와 자본주의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밝힌 것은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각이 사회를 바꾼 극히 일부의 예가 가능함을 확인한 것 뿐인가? 어쩌면 그가 본 구원을 확인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생각조차 지극히 속물적인 것인가?


나는 스스로 질문해볼때, 신앙이 성향을 만들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남이 평가해줘야 객관적 답이 되겠지.

그럼 지금 내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다시 돌아간다. 내 기질과 성격, 환경, 사회경제적 지위... 

여전히 오해하고 있는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내 생명이 있는한 가치 있게 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위안이다.

살아갈수록 단순하던 일들이 복잡해지고,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경험과 생각이 깊어지는 만큼 깊이있게 삶의 맛을 느끼고 싶다.



현재 맞춤법에 따르면 '몇일'은 잘못된 표기이다.

'며칠'로 적어야 맞는다.

기억에는 날수를 셀때는 '몇일' 기간을 말할때, 즉 '며칠동안'일때는 '며칠'로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그것도 아니다. 두 경우 모두 '며칠'로 적어야 맞는다.

이유는 자세히 소개된 글이 있어 링크한다.

초등교사 엔하늘의 생각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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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활'이 맞나? 아니면 '역할'이 맞나?

결론부터 말한다. '역활'은 없는 말이고, 그래서 '역활'이라고 쓰면 잘못 쓴 글이다. 틀린 말이다.


어느 포스터를 보고 생각이 나서 사전을 찾아봤다. 

'역활'을 검색해보니 '역할'의 잘못이라고 나온다.

얼마나 틀리게 쓰는 경우가 많으면 사전에 그렇게 나올까...



역할의 뜻은 다음과 같다.

(안드로이드 사전 colordict 검색결과)

제발 좀 이 정도 우리말은 제대로 쓰면 좋겠다.

나도 혹시 실수 할까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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