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자다가 꿈을 꿨습니다. 성경에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가끔씩 개꿈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아닌가 하는 왠지 아주 중요한 것 같은 꿈을 꿉니다.제가 꾼 꿈은 그런 특별한 계시의 꿈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개꿈도 아니었습니다. 나름 의미가 있는 제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꿈이었습니다.

저는 꿈을 무의식과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의식은 또다른 나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내가 너무 힘들거나,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으면 꿈을 통해서, '너 너무 힘들어, 쉬어야 해' 라거나 '이거 중요한 거 잊어버리고 있잖아~'하고 알려주는 또다른 나입니다.

 

 그 며칠 전 꿈에 저와 어떤 멋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옷을 잘 입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 옷 입은 거 어때?" 아내는 "어 멋있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가만보니 저도 그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옷이 어떤가 보다. 몸매와 얼굴이 중요한 거 아냐?"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렇지" 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외모지상주의자야~"

여기서 아내는 제 꿈속에서 말한 사람이니까, 현실의 제 아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꿈을 꾸고 바로 깼는데, 내용이 재미 있어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중심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중심이 중요하지만, 사람은 그 중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만나서 시간을 가지고 겪어봐야 조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겉모습을 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고 그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만남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만남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만나서 함께해야 할 때,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선입견을 갖거나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눈을 구하며 판단을 보류해야 합니다.

 살면서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데, 노력과 통찰력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사람의 중심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한국만큼 외모를 중시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옷도 잘 입고, 화장도 잘 하고, 머리도 잘 꾸밉니다. 남자들도 눈썹 다듬고, 피부 관리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렇게 외모를 꾸미면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기에 외모도 능력이라고 합니다.

외국에 나와 살다 보니,이곳도 외모에 따라 선입견을 갖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한국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하는게 아니라, 그만큼 경쟁을 해야 하는 사회라서 조금이라도 더 경쟁력을 가지려는 노력이기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외모의 힘은 처음 만날 때부터 작용해서 시간이 갈수록 영향력이 약해집니다. 만날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성격과 성품, 인격 등이 더 중요합니다. 외모를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내면을 가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Career를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요한 실력을 키워야 하고, 외모를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격이나 지식이나 특별히 우리는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 아닐까요?

 

 하지만 외모가 부족한 사람은 열등감과 상처를 안고 삽니다. 그래서 스스로 내면을 가꿀 힘을 갖기도 어렵습니다. 어려서부터 못난 외모에 무시 당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내면을 키워서 당당하고 따뜻하고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가꿔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고 기억할 것은 외모와 성격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여기시며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경험하며 살 때, 외모나 조건에 관계 없이 당당하게, 자신있게 내면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꿈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두 가지 다짐을 해 봅니다.

하나는 '사실보다는 마음을 말하자'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처 받기보다는 자신을 가꾸자'는 것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친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외모를 묻거나, ‘저 사람 어때?’하고 묻기도 합니다. 그 때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는,마음’을 말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날씬하지 않은 몸을 보면서, 나 뚱뚱하지?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남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화낼 테고,날씬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삐질 테니까요.객관적인 사실을 말할 필요도 없고,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땐 마음을 말합니다. "내 눈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멋있어)", "당신은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이런 말입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말, 사랑을 표현하는 말, 진심을 담은 말이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존귀한 존재로 만듭니다.

 

 저는 사춘기 때 만족이 안 되는 외모를 고민하다가 내 책임이 아닌 유전의 일은 내가 고민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보다가, 예수님이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6:27)" 하신 말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외모에 대해서는 잘 씻고, 얼굴의 털들을 잘 관리하고, 옷을 신경써서 입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면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외모가 빼어나지 않다고 열등감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또 외모에 대한 평가에 상처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격을 가꾸고, 지식을 쌓고, 교양을 쌓고, 인격을 성숙시켜가며, 필요한 능력을 키우고, 좋은 생각으로 마음을 가꾸고, 건강한 믿음으로 사는 길이 더 행복한 인생으로 가는 길입니다.

 

 옛날에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착하고 노래 잘하지만 뚱뚱해서 무대에 서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던 주인공이 전신성형을 해서 날씬하고 예뻐진 후에 가수가 되고 인기도 얻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 안에 외모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 외모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오래 지낼수록 그 중심의 가치를 알아보게 됩니다.

 

 젊어서 예쁘고 잘 생겼다고 해봤자 나이가 들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몸도 늙어갑니다. 외모가 전성기를 지나고, 또 경제력이 전성기를 지나면 남는 것은 살아온 흔적과 내면의 아름다움 뿐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수록 내면이 깊어지고 지혜로워지며, 대하기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렇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적'이라는 말  (0) 2021.04.20
‘성경적’, ‘세계관’  (0) 2021.04.15
하나님의 이름은?  (0) 2020.06.18
백문이 불여일견?  (0) 2020.06.18
교회의 역사 이야기  (0) 2020.04.20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금방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Jehovah’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단 종파인 ‘여호와의 증인 Jehovah's Witnesses’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집착하는 이단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오고, 그중에 ‘여호와’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명칭이 있습니다. 모음

이 없었던 고대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를 알파벳으로 표시하면 YHWH가 되는데, 문자로 표시는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여 소리 내어 읽지 않았고(혹은 아도나이라는 말로 대체해 읽었음), 결국 그 발음이 잊혀졌습니다. 그 자음의 발음에 하나님을 뜻하는 또 다른 호칭인 ‘아도나이(나의 주님)’의 모음을 합해서 ‘여호와’라는 발음을 만들었고, 그것이 성경에 쓰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자료에서도 여호와가 정확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전통을 인정해서 그대로 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정확한 발음은 무엇일까요? 사실 사라진 발음이기 때문에 정확한 발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야웨’라는 발음이 원래 발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야웨’가 하나님의 이름일까요?

 

 성경 출애굽기 3:13~15은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시고,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밝히는 표현이 나오고, 또 ‘여호와’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모세의 질문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화를 반영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냐는 것입니다. 그 말은 어떤 능력을 가진 신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이름은 능력과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이고 또 수많은 신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신이냐고 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시면서 결국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 ‘I am who I am’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다’, ‘나는 누가 창조한 존재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있게 하는 존재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그 ‘여호와’라는 말은 YHWH를 번역한 것이고 그 말은 위에서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히브리어 발음이 ‘예흐웨 아쉐르 예흐웨’ 임,아쉐르’가 who로 관계대명사, ‘예흐웨’가 나는 있다는 의미)

 

 그런데 이 의미를 조금 더 깊게 해석하는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이 ‘예흐웨’가 히브리어 문법으로 미완료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문맥에 따라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로 해석이 가능한데, I’m who I’m은 현재로 해석하는 것이지만, 히브리어의 어감을 살리는 번역은 ‘I will be what I will be’입니다. ‘나는 내가 앞으로 할 일을 통해 어떤 존재인지 보여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고? 과거에 내가 한 일을 봐라.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봐라.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을 보면 알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나는 너를 통해서 나의 뜻을 이루는 자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의 출처는 팟캐스트 비블리아(podbbang.com)42화 내용 중 후반부에 나온 내용이며, 독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중세 유대 랍비의 해석이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은 어떤 이름으로 규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식과 지혜와 상상을 넘어계신 분으로,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그 뜻을 구하고 순종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뿐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나의 인생에 함께 하시며 인도해 주신 하나님,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의 미래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실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그 터전이 되기를 바라고, 각자 맡겨주신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적’, ‘세계관’  (0) 2021.04.15
꿈, 외모지상주의, 두 가지 다짐  (0) 2020.10.02
백문이 불여일견?  (0) 2020.06.18
교회의 역사 이야기  (0) 2020.04.20
성경 연대기 이야기  (0) 2020.04.20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번 들어봐야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죠. 영어 표현에도 비슷한 말이 있네요. Seeing is believing. 사람이 세상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감각의 비율이 시각이 80%, 청각이 10%, 기타 나머지 감각이 10% 정도라고 합니다. 뇌에서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부분이 다른 감각을 담당하는 부분보다 훨씬 발달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면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까요? 보통은 그렇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이 보이지 않거나 시력이 나빠서 잘 안 보인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또 시각 정보가 강력하고 판단에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눈에 보이는 부분만 속인다면 거짓을 사실로 믿게 될 것입니다.

 아주 옛날 영화인데, Back to the future의 한 장면을 원래 배우가 아닌, 아이언 맨의 Robert Downey, Jr.와 스파이더 맨의 Tom Holland로 얼굴을 바꾼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감쪽 같았습니다. Deep fake라는 얼굴 바꾸기 기술로 만든 장면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그래픽은 사실이 아닌데 눈으로 보기에 사실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영상은 Youtube에서 ‘Robert Downey Jr and Tom Holland in Back to the future - This is heavy! [ deepfake ]’을 검색해서 볼 수 있습니다.)

 

 착시현상은 눈을 통해서 우리의 뇌를 속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줍니다.

 옆에 있는 세 선의 길이는 모두 같습니다. 하지만 화살표를 어느 방향으로 그려주는지에 따라서 같은 길이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분명히 봤는데, 잘못 본것을 믿었다가 실수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용해서 보는 사람을 속이는 기술입니다.

 인간에게 시각 정보는 가장 구체적이고 믿을만한 정보이면서 반대로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입니다.

 

 세상에 제일 못 믿을 것이 광고입니다. 광고의 목적은 보는 사람에게 너무 좋은 것, 꼭 필요한 것이니 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팔려는 상품의 좋은 점은 더 크게 강조하고 안 좋은 점은 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은데 사고나서는 후회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다가, 보는 것과 믿는 것에 대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두 군데 말씀인데, 하나는 요한복음 20:29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입니다. 예수께서 ‘직접 보고 상처를 확인하기 전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 던 도마에게 찾아와 하신 말씀입니다. 또 다른 곳은 마태복음 28:17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봐야 믿겠다는 도마와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눈으로 확인해야 믿고, 어떤 이는 봐도 믿지 못합니다. ‘보는 것’, ‘믿는 것’, 말은 같지만 시각 정보를 믿는 것과 신앙의 믿는 것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살이 가운데서는 보는 것을 그대로 다 믿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고 걸러야 할것은 뭘까요? 또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씩만 얘기해 보겠습니다. 관심도 두지 말고 걸러야 할 것은 이단이죠. 처음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아닌것처럼 접근하기 때문에 미리 알아두고 잘 걸러야 합니다. 확인하지 않아도 믿어야 할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생각할 때 나 자신이 사랑받을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부족함이나 못남보다 그것을 다 덮는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 모두 평생 그 사랑 안에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 외모지상주의, 두 가지 다짐  (0) 2020.10.02
하나님의 이름은?  (0) 2020.06.18
교회의 역사 이야기  (0) 2020.04.20
성경 연대기 이야기  (0) 2020.04.20
정직한 그리스도인 Honesty Christian  (0) 2018.06.15

캘거리제일감리교회

이경민 목사

(kfmc.calgary@gmail.com)

 

 지난 글에 성경의 역사 이야기를 다뤘고 이번에는 성경 이후 교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전체적인 흐름을 한번 훑어본다고 생각하시고 큰 틀을 살피는데 의미를 두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교회사 시대 구분을 통해서 거시적인 눈으로 보겠습니다.

 

이번의 내용을 시대별로 정리하면,

초대교회, 확장과 박해의 시대-중세, 교회 권력의 시대-개신교의 탄생, 개혁의 시대-제국주의와 선교의 시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교회 역사의 마지막은 사도행전이 담당합니다. 교회의 탄생 그리고 전도와 선교 이야기입니다. 유대인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교회는 유대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주 빠르게 부흥합니다. 더 강한 박해가 가해지자 교회가 흩어지면서 더 넓은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지리적으로 넓어지고, 성도가 많아지는 것과 동시에 유대인과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를 [확장과 박해의 시대]라고 부르겠습니다. 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의 이방인 선교로 인한 이방인 교회로 자라 갑니다.

 

 이후에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공인과 380년 데오도시우스 1세의 로마 국교화로 교회는 정식 종교로 인정받고 로마 세계 전체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유대교의 이단 분파로 취급받으며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제국에 반하는 집단으로 지목되어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던 종교가 그 제국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300여 년여년 만에 하늘과 땅 차이의 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사도에서 속사도(교부)로 세대교체가 되었고, 유대교와 로마 권력의 도전이 지나가자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종파들의 거센 도전이 몰아쳤습니다. 교회는 그 도전에 대응하면서 교리를 형성했습니다. 기독론과 삼위일체 교리 등을 체계화했습니다.교회는 이후 10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하는 권력이 됐습니다. 그리고 권력과 재물을 가진 교회는 부패해 갔습니다. [교회 권력의 시대]라고 부르겠습니다.

 

 중세 교회는 정점을 지나 부패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이 싹트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루터 Martin Luther의 종교개혁(1517년)을 잘 아시겠지만 이전에도 여러 가지 운동과 개혁적인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개혁의 시대가 무르익던 때 신부이자 교수였던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문에 95개 조의 신학적 반박문을 게시한 것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츠빙글리, 칼뱅 등이 당대의 다른 종교개혁가입니다. 이렇게 해서 개신교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개신교회는 이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신앙의 중심은 교권이나 교황의 귄위를 버리고 오직 다섯 가지의 신앙지표(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를 세웠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 교회도 자성하고 개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를 [개혁의 시대]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다음 세계 역사의 흐름은 제국주의 시대로 이어집니다. 유럽의 각 나라가 해양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 여러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아 수탈하던 시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잡아가던 시대입니다. 역설적이게 이 시대는 세계의 문명들을 연결했고, 교회는 식민 제국주의를 통해서 선교의 문을 열어갔습니다. 임진왜란(1592년) 때 이미 일본에 선교가 이뤄져서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일본군에 종군 신부(Gregorio de Cespedes, 왜군의 종군신부로 보는 것은 잘못됐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는 일본 부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 했다고 합니다)가 있었고, 영화 ‘미션’의 배경이 1750년으로 이 시대입니다. 북미 대륙에 백인들이 들어오고 미국과 캐나다가 생긴 것도 이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넓게 본 제국주의 시대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기간을 선교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 선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와 선교의 시대]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제 시대가 우리와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기독교가 전해졌을까요? 일설에는 신라 때 당을 통해서 경교가 들어왔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고려시대에 교황이 고려에 선교사를 보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조선 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인정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가 시대가 다릅니다. 천주교는 조선말에 실학자들이 새로운 사상으로 중국을 통해 배우고 공부하면서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교 역사에서 아주 특이하게 자발적 선교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천주교 서적들을 중국을 통해 구해 공부했고, 믿는 사람들이 생겼으며 선교사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카톨릭 신자들은 쇄국정책과 조선의 신분질서와 갈등으로 박해를 받게 됩니다.

 개신교의 선교는 공식적으로 1885년 아펜젤러(감리교)와 언더우드(장로교) 선교사가 제물포(인천)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1832년 홍주목 고대도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인 암허스트 호가 들어왔는데 그 배에 통역과 의사로 동행한 귀츨라프 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가 개신교의 선교사였습니다. 고대도에 20일 정도 머물며 조선 조정에 통상을 요청하고 기다렸는데 그동안 주민들과 만나고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감자 농사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쳐주고, 한글을 배워 서구세계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또 개신교 선교사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에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왔습니다. 미국의 무장상선으로 강제로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통해서 내륙으로 들어갔는데 배가 좌초했고, 조선군의 공격에 파괴되고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참수됐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그때 순교하는데, 자신을 죽이는 조선 병사에게 성경을 전하고 죽었습니다. 그 성경을 받은 사람이 박춘권인데 그가 30여 년 후에 1899년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개신교의 선교 특징 역시 특이한데 선교사가 들어가기 전에 한글성경 번역이 먼저 이루어진 점입니다. 중국에서 로스 John Ross 선교사가 한글성경을 번역했는데, 그는 중국에 있던 선교사로 조선에 관심을 갖고 조선 사람들을 만나며 한글로 성경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또 일본으로 유학 갔던 이수정이 1883년 신앙을 갖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1884년에 한문성경에 이두 토를 단 성경을 인쇄하고, 1885년에 순한글 본 <신약전서 마가복음셔 언해>를 인쇄했습니다. 드디어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을 합니다. 그들은 이수정을 만나 인쇄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개신교 선교는 카톨릭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탄하게 시작됐습니다. 대한제국의 인정을 받고 선교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서양문물을 통해서 의료기술과 교육제도를 전하며 그야말로 빵과 복음을 함께 전한 것입니다. 학교를 세웠고(배재학당, 이화학당, 연희전문 등) 광혜원, 시병원 등 근대식 병원도 세웠으며 여성만을 위한 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웠습니다. 광혜원은 후에 미국인 세브란스 L. H. Severance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고, 연희전문과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통합하여 설립된 대학이 연세대학교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선교 역사와 많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후의 우리 역사는 슬픈 기간을 맞게 되는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1910년 한일병탄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우리 민족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측 대표였고, 3.1 운동을운동을 전국적으로 연결한 것이 교회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회 역사의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신사참배 참여와 1945년 해방 한 달 전 7월에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통합되어 여러모로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일본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해방 후 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 등으로 큰 갈등을 겪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을 통해 민족과 교회는 다시 한번 큰 아픔을 겪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서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어두운 면도 있고 놀라운 부흥의 역사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를 함께하며 교회는 놀라운 양적인 성장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은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전쟁 후 국민소득 67불의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선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양적인 성장을 멈추고 숫자로만 보면 쇠퇴하고 있습니다.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제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넘어서 질적인 성숙을 이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캐나다 이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요? 두번에 걸쳐서 성경으로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 그리고 한국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앞날을 보면서 어떤 믿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바라볼 시간입니다.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이름은?  (0) 2020.06.18
백문이 불여일견?  (0) 2020.06.18
성경 연대기 이야기  (0) 2020.04.20
정직한 그리스도인 Honesty Christian  (0) 2018.06.15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Selfish Christian  (0) 2018.06.15

캘거리제일감리교회

이경민 목사

kfmc.calgary@gmail.com

 

 이번에는 아주 짧게 요약한 성경 연대기 이야기로 한번, 그리고 성경 이후의 교회사와 한국 교회사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 연대기를 머리속에 큰 그림으로 두고 성경을 읽으면 전체적인 그림 안에서 읽는 부분의 위치와 의미를 알고 흐름을 볼수 있어서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의 흐름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족장 시대-이집트거주 시대-출애굽 시대-사사 시대-통일왕국 시대/분열왕국 시대-바벨론 포로 시대-신구약 중간 시대

-신약시대-로마에 완전 멸망

 이렇게 볼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의 역사 이야기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11장까지 다루는 원역사를 넘기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성경의 연대기는 결국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역사인데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은 아브라함으로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한 개인을 부르시고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과정입니다. 또한 이 족장들은 완성된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처럼 어리석고 연약하며 믿음 없는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우르’에서 살았는데 우르를 떠라 ‘하란’으로 왔고, 거기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떠나서 간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때를 주전 2000년 정도로 보며 청동기 시대였습니다.

 

 그 다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집안이 요셉을 통해서 이집트로 들어가 사는 시대입니다. [이집트 거주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그곳에서 430년을 살았다고 기록합니다.(출 12:40) 그 기간 동안 중요한 것은 이집트에 들어갈 때 70(창 46:26)명이었던 가문이 이집트를 나올 때는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남자 성인이 60만명(민 1:45,46, 전체 인구는 보통 200만명 정도로 봄)인 민족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이집트로 들어갈 때는 환대를 받고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출애굽기가 기록하듯(출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이스라엘을 핍박하여 고된 노동에 시달려서 나올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는 점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게 됩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독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게 하십니다. [출애굽 시대]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광야 생활이 40년이며 그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리고 성부터 시작해서 그 땅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갑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세우기 전까지 왕이 없는 시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이 지도자 됐던 때가 [사사 시대] 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는 강하던 이스라엘인데,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민족에게 끊임없이 침략당하고 시달리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왕이 없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삿 21:25)라고 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 없어서 강하지 못해 침략당한다며 왕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사사 중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고, 하나님은 사울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때가 주전 1050년 입니다. 사울 왕조는 사울 당대로 끝나고, 뒤이어 다윗 왕조가 서게 됩니다. 사울부터 다윗을 거쳐 솔로몬까지 이스라엘은 한 나라로 지내서 [통일 왕국 시대]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유명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때부터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눠져서 다윗 왕조는 유다를 다스리고 북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신하인 여로보암이 시작했지만 계속해서 왕조가 바뀌는 반란이 이어집니다. 이때를 [분열 왕국 시대]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합니다. 남유다도 오래가지 못하고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분열왕국 시대는 또 예언자들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들이 백성들의 죄와 멸망 그리고 회복을 예언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민족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들의 죄로 인해서 자기 백성을 멸망하게 하시는 매를 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시대가 되어 이주정책에 따라서 많은 백성이 바벨론에서 살게됩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라고 합니다. 유다가 멸망할 때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이 파괴됩니다.

 

 바벨론도 영원하지 않아서 70여년(유다멸망부터 따지면 70년이 안되지만 성경은 70년이라고 기록함. 사 23:15, 렘 25:11, 대하 36:21, 슥 1:12, 단 9:2) 후 페르시아에게 망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주전 538년에 명령을 내려 유다 백성을 자기 땅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성전을 재건하도록 합니다. 이때 다시 지은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나 2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여기까지가 구약성경이 기록하는 이스라엘의 간략한 역사입니다.

 

 구약성경의 시대 후에 신약의 복음서가 다루는 시기 전까지, 성경이 다루지 않는 기간을 [신구약 중간기]라고 합니다. 그 기간이 약 400년 정도 됩니다. 페르시아의 통치와 알렉산더의 그리스 통치가 이어지고 주전 166년부터 마카비 왕조가 독립 유다 시대를 엽니다. 독립 유다 시대는 기원전 63년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될 때까지 유지됩니다. 신약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시대는 로마 제국 치하의 유다 지역을 로마가 세운 헤롯이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큰 규모로 증축합니다. 이것을 제3성전 혹은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헤롯은 예수님이 나실 때 유아 학살 명령을 했던 사람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때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로 헤롯 1세의 아들입니다.

 기원전 63년의 유다와 로마의 전쟁을 제1차 유다 전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이후 132년에 유다는 로마에 항거해 독립전쟁을 일으키는데 결과는 처참한 패배로 끝났고, 로마는 유다 지역의 이름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꿔버리고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하고 유다인을 추방했으며 이름도 바꿔버렸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나 유다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남은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2차 대전 이후 유엔의 결의와 ‘팔레스타인 유대인 기구’의 이스라엘 수립 선언으로 유대인의 나라로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전하는 내용을 연대기 순으로 간략하게 정리해봤습니다. 이렇게 개관해보니 시대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인도하시는 손길을 볼수 있고,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한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도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체를 보는 눈으로 성경 역사의 흐름을 기억하고 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더 깊게 느껴질 것입니다. 다음번엔 성경 이후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저의 분류와는 조금 다르지만 참고로 도표로 정리된 자료를 올립니다.

 

아래는 성경의 연대기와 세계사, 한국사를 비교한 도표입니다. 대략 비교해보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의 시대가 가까운것 같지만,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삼국시대에 해당합니다. 구약의 내용은 거의 다 고조선 시기에 해당하네요.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문이 불여일견?  (0) 2020.06.18
교회의 역사 이야기  (0) 2020.04.20
정직한 그리스도인 Honesty Christian  (0) 2018.06.15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Selfish Christian  (0) 2018.06.15
성경의 형성과 번역  (2) 2017.10.31


정직한 그리스도인



2004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정직하겠습니다'라는 주제로 정직한 감리교인, 정직한 그리스도인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제가 새겨진 스티커를 선풍기 커버 가운데에 붙여두었는데, 그 선풍기를 사용할 때마다 보여서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한 교단이 주제로 삼아 운동을 벌인 주제였으니 중요한 것이겠지요. 기독교인은 정직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가 스스로 질문을 해보면 어떤 답이 나오시나요? 저는 처음엔 당연히 정직해야지 생각이 들고, 믿음과 정직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기독교인이 얼마나 정직하지 않았으면 그런 운동을 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직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믿음의 지혜를 가르치는 잠언 3:32에 보면,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라고 하여 정직한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또 잠언 12:22에도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라고 하여 거짓을 따르지 않고 진실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십계명의 내용에도 "거짓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하셨고, 가나안 진입을 앞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가 전한 말씀인 신명기의 6:18에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정직이 복이 된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 길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초대교회 때 거짓말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행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성경을 볼때 그리스도인이 정직해야 하는 것은 말하나마나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종교 신뢰도 조사에서는 교회가 늘 가장 낮은 순위로 나타나고, 사람들은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더하다고들 하고, 각종 비리 사건에는 기독교인이 빠지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 지도자들이 깊이 반성하고 책임을 느껴야합니다. 더불어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사람들에게 위로와 축복의 약속만 제공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교회의 목표가 양적인 부흥이 되면 나타나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正直)은 한자말인데, 바를 정, 곧을 직으로 씁니다. 바르고 곧다는 말입니다. 솔직(率直)하다는 말과 비슷한데, 솔직은 거짓이 없고, 숨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별 차이가 없는 말이겠지만 저에게는 두 단어의 어감이 좀 다릅니다. ‘솔직’은 숨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지고 ‘정직’은 책임지는 자세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모든 일을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솔직한 것이고, 옳은 길을 가려고 노력하고, 그 일로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책임있게 행하는 것이 정직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속이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한다고하며 있는 그대로 말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뒷일은 나몰라라 합니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버리는 것이 좋을까요? 잘못한 일을 물을 때, 솔직하게 내가 그렇게 했다고 인정만 하면 정직한 태도일까요?


정직에는 옳은 길을 따른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이 들어있어서 솔직하기 보다 정직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정직은 자기의 이익을 따르지 않고 옳은 길을 따릅니다. 정직은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 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고전 13:6) 정직은 하나님의 뜻을 기준 삼아 사는 것이며, 그 길을 선택해서 자신이 희생할 일이 생기더라도 기꺼이 가는 것입니다. 정직은 그저 거짓말을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정직하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교인일 뿐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정직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손해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용기가 있어야 정직할 수 있습니다. 정직해야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만 얘기해서 우리가 정직해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정직한 삶이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 때 가능한 일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신뢰를 받습니다. 더 큰 유익은 천국의 보화를 쌓게 됩니다.(눅 12:33) 정직은 세상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과 영생에 대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유한한 세상의 일과 영원한 영혼의 일을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죽어서도 좋은 것을 갖겠다는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이 다가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가치를 알고 세상에서 영원을 살겠다는 믿음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천국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가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의 역사 이야기  (0) 2020.04.20
성경 연대기 이야기  (0) 2020.04.20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Selfish Christian  (0) 2018.06.15
성경의 형성과 번역  (2) 2017.10.31
성경이 진리인가요?  (0) 2017.10.25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뱀파이어 크리스천Vampire Christia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Dallas A. Willard가 사용한 용어입니다. ‘뱀파이어 크리스천’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자가 되어 순종하는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흡혈귀가 사람이 아니듯이 성도처럼 보이지만 ‘뱀파이어 크리스천’은 온전한 성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감동시키기는 커녕 안믿는 사람들보다 더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해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교회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처음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셨고,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좋아 보였고, 부럽고,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의 역사에서 교회는 세상에 빛이 되어 왔습니다. 의료와 교육, 복지 사업을 통해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알려줬고,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많은 역사의 순간에서 교회의 전한 바는 억눌린 사람들에게 진정한 복음이 되었습니다. 약자로 희망 없이 살던 인생에 자유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속물스럽고 더 탐욕스러우며, 예수님의 기준이 아닌 세상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 이하의 집단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뱀파이어 크리스천 교회가 딱 맞는 이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 시대의 상식보다 못해서일까요? 그럴리가요.


이 현상은 심각합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 있었던 박해와는 다른 일입니다. 박해는 믿음 때문이었고, 그 믿음을 지키느라 받은 것이지만, 지금의 문제는 오히려 교회가 믿음의 길이 아닌 길로 가기에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믿는자들이 모두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도 없는 것이고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복음에도 없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욕먹었던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돌아보면 문제는 명확합니다. 교회가 그 근본 가치인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입으로만 외치기 때문입니다. 또 신앙생활의 열심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일 너머를 보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만나기 어렵습니다.


교회의 가치와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좋은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큰 교회는 교인이 많은 교회고, 그 교회의 목사님이 큰 목사님이고, 그런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면 어쩐지 자부심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요? 

'교회만 그러냐? 다른 종교는 더하다.'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더한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시대가 악해서 그런것일까요? 아닙니다. 다른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어떤 종교든 기득권이 되면 타락했고, 번영기를 거치면 그 생명력은 희미해졌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을 이루고 형식화되고, 사람들의 요구에 맞게 세속화되고... 결국 종교를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었습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면 그곳에 많은 수가 모이고, 그것이 더 가속화되면서 결국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그것이 그 종교의 가치가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까지 인정이 된다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요? 비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는 사실 교회좀 다닌 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고, 심지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할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 질문이 남습니다.

1517년, 501년 전에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새로운 교회인 개신교가 생겼습니다. 500여 년이 지난 지금 개신교는 숫자와 크기, 물질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고 있고 어떤 이들은 그런 흐름에 반하여 교회가 개혁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종교가 500년이 지나면 개혁해야 할 만큼 타락하게 된다는 얘기도 합니다.


새로운 교회가 필요할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저는 여전히 지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고, 지난 시대의 시스템 안에 있습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로운 교회, 새로운 목회를 꿈꾸며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기존의 것을 반대한다고 옳은 것이 아니고, 지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는다고 선이 아니라는 생각도 합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만 그 흐름이 일어나는 쪽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 연대기 이야기  (0) 2020.04.20
정직한 그리스도인 Honesty Christian  (0) 2018.06.15
성경의 형성과 번역  (2) 2017.10.31
성경이 진리인가요?  (0) 2017.10.25
종교와 개인  (0) 2017.10.20


성경의 형성과 번역


이경민 목사(캘거리제일감리교회, kfmc.calgary@gmail.com 587-432-0691)


<사해사본>


 이번에는 성경의 형성과 번역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전문적인 글이라기 보다 한 목회자의 성경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과 정보들이라고 생각하시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 셀러라는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은 39권의 책들로 이루어진 구약성경과 27권의 책들로 이루어진 신약성경이 합본인 성경전서를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와도 공유하고 있는 반면 신약성경은 기독교만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슬람교도 신약성경을 사용하지만 구약과 신약성경 보다 코란의 권위가 더 높습니다.) 성경은 1,500여년 동안, 40여명의 저자가 기록한 여러 문서들로 이루어졌으며 유대인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경전입니다. 오랜 세월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문학 형태로, 다양한 저자들이 기록했고 또한 하나님의 뜻과 예수가 그리스도임과 예수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전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로는 Canon이고 그리스어 카논(χανων)에서 온 말입니다. 카논은 원래 갈대나 긴 나무가지라는 뜻입니다. 길이를 재는 도구가 없었던 고대에는 이런 것들을 자 대신 썼기 때문에 카논은 결국 어떤 것을 재는 기준, 척도라는 뜻이 되고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라는 말은 성경이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정경화

 성경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문서로 기록되기 전에는 구전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 내려오던 중요한 믿음의 이야기들을 문서로 기록했고 중요한 문서들이 모이면서 경전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형성과정은 워낙 오래된 일이라 확실히 알수 없습니다. 그저 구전이 문서화됐고 아마도 포로 귀환때쯤 정리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현재의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밝힌 것은 A.D. 90년경의 얌니아 랍비 회의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구약을 가리켜서 ‘아벨에서부터 사가랴까지’라는 말씀(눅 11:51)을 보면 A.D. 90년 이전에도 이미 구약 정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벨은 창세기에 나오고, 사가랴는 역대하에 있는데 히브리 구약 분류에는 창세기는 그 첫권이고 역대하가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구약 정경의 형성 시기를 포로 이후 시대인 B.C.440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성경의 원본은 없습니다

 원래 원본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내용과 형태가 다른 사본들이 너무 많아서 원문이 발견된다 해도 사본 중의 하나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원문이 발견돼도 알수가 없습니다. 오래된 성경의 사본들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본들의 발견과 연구를 통해서 구약의 원래 형태를 계속해서 발견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번역한 성경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본학의 결과와 번역된 언어의 변화에 맞게 개정하는 것입니다.


구약, 타나크, 토라

 기독교에서 구약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유대교에서는 “타나크”(TaNaK, תנ"ך )라고 부릅니다. 타나크는 세 구분(תורה 토라, נביאים 네비임, כתובים 케투빔)의 첫자음에 '아' 발음을 붙여 만들었습니다.(괄호 안의 글씨는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읽습니다.)

 '토라'는 구약의 앞에서 다섯권의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가리키는데 보통 '모세오경'이라고 하고 그냥 오경이라고도 합니다. 모세가 기록했다고 전하는 다섯권의 중요한 경전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타나크 중에서도 이 오경에 더 권위를 둡니다. 율법서라고 할수 있습니다. '네비임'은 예언서들입니다. '케투빔'은 성문서인데 경건한 문서입니다. 시편, 잠언, 욥기, 아가, 룻,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대인의 타나크는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과 내용은 거의 같지만 배열 순서가 좀 다릅니다. 성경의 분류와 보는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70인역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일부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인 '디아스포라'들을 위해 그 당시 국제어인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70인역 성경입니다. 70인역 성경은 72명의 지파별 대표들을 뽑아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는데, 나중에 비교해 보니 내용이 똑같았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물론 전설입니다. 이 헬라어 번역성경은 신약에서 인용하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마소라 텍스트'를 줄여서 'MT'라고 표기하고, 70인역은 로마식 숫자 표기로 70인 'LXX'로 표기하고 '셉투아젠트'라고 읽습니다. 이 두 구약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차이는 히브리어 성경(MT)에 없는 책들이 헬라어 구약(LXX)에는 들어있습니다. 지금은 그 책들은 외경(혹은 제2경전)으로 분류되며, 카톨릭에서 정경의 권위보다는 못하지만 참고할만한 책으로 성경에 함께 들어있습니다. 개신교의 성경에는 외경이 없습니다.


외경과 위경

 '외경'(外經, αποκρυφα, Apokrypha)은 정경 밖의 경전이란 뜻으로 쓰는 용어입니다. 카톨릭에서 제 2의 경전이라고 부르며 성경에도 들어가 있고 정경과는 다르지만 읽으면 도움이 되는 것으로 경전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개신교 성경에는 외경이 없습니다. 외경에는 마카베오기 상, 마카베오기 하, 지혜서, 집회서, 유딧기, 바룩서, 토빗기, 에드서(에스테르기) 10장 4절~16장, 다니엘 2장 24~90절, 13, 14장 등이 있습니다.(공동번역 성경과 가톨릭성경 기준) 

 또 '위경'(僞經)ψευδεπιγραφα, pseudepigrapha)이라는 책들도 있는데, 이것은 허위 성경이란 뜻으로 정경과 외경에도 들지 못한 성경입니다. 위경에는 에녹서, 모세의 승천기, 이사야 승천기, 아기 예수전, 마리아의 승천기, 도마복음, 유다복음 등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구약은 모음이 없었다

 AD 500년 이전의 히브리 사본에는 장모음을 표시하는 일부 자음을 제외하고는 모음이 없었습니다. AD 600-950년에 마소라(Masoretes)라고 불리는 유대인 학자들이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서 모음체계와 악센트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데, 현재 한글 성경에 '여호와' 혹은 '야웨'라고 번역된 하나님의 이름이 실은 발음을 모르는 단어입니다. 모음이 없는 글자로 기록된데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의미로 읽지 않거나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라는 말로 대체해서 읽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정확한 발음을 알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자음을 통해서 추측한 발음이 여호와나 야웨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 기독교만의 경전, 정경화 과정

 A.D. 4세기 중엽부터 정경 확립의 중요성을 깨달은 동서 교회는 A.D.363년 라오디게아 종교 회의, A.D.393년의 히포 종교 회의 등 주요한 종교 회의를 거쳐 마침내 A.D. 397년 칼타고 종교 회의에서 현재와 같은 신약 27권의 정경을 정했습니다.

 정경의 목록을 결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자료마다 내용이 차이가 있어서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사도가 직접 썼거나 사도와 직접 관계 있는 사람이 쓴 믿을만한 책(사도성)

2.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됐다고 인정할만한 책(영감)

3. 인정 받은 다른 책과 모순이 없는 책(모순 없음)

4. 교회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책(보편성)


 현재 정경으로 인정되는 성경들은 거의 처음부터 경전성을 인정 받았지만, 정경으로 결정되었어도 마지막까지 약간 논란이 있던 책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정경으로 인정 받은 책들은 '호모루구메나'(Homolo-goumena)라고 불렀고 논란이 있는 책들은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 αντιλεγόμενα)라고 불렀습니다. 안티레고메나에는 베드로전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 야고보서였습니다.

 신약 경전에 대한 논의는 로마의 주교였던 클레멘스의 편지에서 몇권의 책들을 중요하게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후 영지주의 이단으로 정되된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신약의 중요한 문서들을 정경으로 취급했는데, 그는 구약을 무시했고 구약과 관계 있는 책들을 그 명단에서 제외했습니다. 이 일이 공식적 신약성경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줬습니다. 이후 여러 인물들에 의해서 논란을 거듭하다가 공식적인 종교회의에서 신약성경을 확정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의 기록 시기

 현재 우리가 보는 신약성경은 내용의 연대순으로 복음서 네 권이 앞에 있고, 그 이후 이야기인 사도행전이 있고, 그리고 교회 형성 이후의 내용이 담긴 서신서(편지들)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이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로 쓰여준 순서는 이와 다르다고 봅니다. 서신서들이 먼저 기록되었고, 그 다음에 복음서가 기록됐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상 시간 순서로는 복음서의 예수님 이야기가 먼저지만 현실적인 필요성을 생각해보면 교회가 있어서 사도들이 치리해야 할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먼저 있었고, 예수님의 증인이었던 사도들이 죽고, 곧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예수님은 안 오시는 상황에 예수님의 언행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어서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은 따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이어지는 2권이라고 합니다.


성경과 전통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주 다른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독교,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복음의 본질에 있어서는 같은 기독교입니다.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기독'이라는 말이 '그리스도'가 한자로 번역된 말이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종교는 모두 기독교로 보고, 구교와 신교 혹은 카톨릭과 개신교로 구분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현재 개신교는 대부분 루터와 여러 종교개혁자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으며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구호는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이전의 카톨릭이 워낙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성경 말씀의 권위만큼 교황의 권위도 높았습니다. 교황이 무오하다고까지 했으니까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와 비교해 약하지 않았습니다. 개신교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사실 카톨릭은 신약성경을 규정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경성을 판단하고 정했던 교회의 권위가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개신교는 그런 모습을 반대하고 '오직 성경'만이 권위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개신교의 출발점은 카톨릭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좋은 부분이 있었지만, 이전 교회 역사 속의 좋은 전통까지도 모두 포기해야 했고, 성경만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오히려 성경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우상화하는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카톨릭이 교권을 성경만큼 높이 둘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제들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강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책 자체가 귀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은 성경을 봐도 읽을 수 없는 문맹이 많았고, 더군다나 성경은 라틴어 성경(Vulgate, 불가타)을 사용해서 보아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종교개혁과 함께 이룬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발달하기 시작한 인쇄술로 인해서 성경이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고,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기록되고, 후에 구약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그 신구약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이후 독일어 번역부터 일반인들이 읽을수 있는 대중적인 성경의 시대가 열리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언어로 번역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자국어로 된 성경이 중요하고 필요에 의해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소수 민족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 번역의 역사를 대략 살피면, 앞에서 말한 라틴어 성경을 쓰는 중세 시대에 고대 영어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했흡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의 영어와 너무 다르고, 많이 남아있지도 않고, 대중들이 읽도록 번역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완역한 것이 위클리프 성경입니다.(1382) 이 위클리프 성경은 루터의 독일어 성경보다 먼저 번역된 영어성경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지고 번역한 틴데일 성경이 루터의 독일어 성경과 비슷한 시기에 나옵니다.


KJV만이 올바른 성경?

 우리말 성경에도 여러가지 번역이 있듯이 주요 언어들은 한가지가 아닌 여러가지 번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성경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KJV라고 하는 King James Version 성경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성경은 1971년 영국에서 번역된 영어성경으로 여러가지 면에서 훌륭한 성경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흠이 없는 번역이라고 흠정역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대의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이후에 더 많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번역 성경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 성경만이 온전한 성경이라는 주장에는 반대합니다. 번역성경을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습니다.


<1887년 로스 선교사 번역팀이 완간한 신약 '예수셩교젼셔'>


한글성경 번역

 우리 땅에 처음 들어온 성경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아니라 한문성경이었습니다. 한문성경이 조선에 전해진 두번의 사건이 있는데,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가 Lord Amherst호를 타고 조선에 들어와 한문성경을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1866년에 토마스 선교사가 미국 상선 General Sherman호로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순교하면서 한문성경을 나눠줬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은 여럿이 훗날 우리나라 교회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죽였던 박춘권은 그에게 받은 성경을 읽고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의 조카인 이영태가 훗날 레이놀즈 선교사와 성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때 성경 세권을 가져간 12살 소년 최치량이 박영식이라는 평양성 관리에게 그 성경을 주었습니다. 종이가 귀했던 때라 성경을 뜯어 벽에 도배를 했는데 벽에 붙은 그 성경을 읽다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조선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는 1907 영적 대각성 운동의 근원지였던 장대현 교회의 전신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성경이 번역될 때는 처음에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아닌 영어성경에서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국내가 아닌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리기 전이어서 가까운 중국에서 조선 선교를 위한 성경 번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John Ross 선교사가 조선인을 전도하고 그들과 함께 한글로 한자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낱권이 1882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여러 낱권 성경을 번역한 후 1887년에 신약을 완역해서 예수셩교전서를 출판합니다. 이 성경은 로스와 매킨타이어 등 서양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이 함께 번역을 했는데, 중국에 근거를 두다보니 그들이 북쪽 지역 사람들이라 말투가 서울말이 아닌 평안도 사투리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향해서 “입닷고 나오라”(막 1:25)라고 하신것으로 번역하는 식이었습니다.

 1884년과 1885년에는 일본에 있던 이수정이 한자성경에 우리말식 토를 달아서 읽을수 있도록 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번역이 나옵니다.

 그리고 1887년부터는 국내에서 선교사들의 번역으로 낱권 신약이 출판되다가 1900년에 신약 한글 완역인 '신약젼셔' 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911년에 구약젼셔가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이 개역성경 이전에 '구역'이라고 불리는 번역입니다. 이 구역을 개정해서 번역한 것이 1938년의 '성경개역' 입니다. 다시 개정한 것이 1961년의 '개역한글판' 성경입니다. 그리고 1998년에 '개역개정판' 성경이 나왔습니다. 어린시절 보았던 검은표지에 빨간색 옆면을 가진 세로쓰기 성경과 한자가 섞인 성경은 개역한글판 성경이었습니다.

 한글 성경 번역의 특징은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이 시작되었고, 이후 국내에서 번역되기 시작했으며, 신약성경부터 번역하고 이후 구약성경을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대한성서공회 번역

 대한성서공회는 대한민국에서 성서의 번역과 출판을 하는 재단법인 입니다. 1947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뿌리는 1895년 영국성서공회의 조선지부에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초기 국내 성서번역 작업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이후 1938년 조선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가 1940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다가 1947년 8월 19일에 대한성서공회로 설립되었습니다.

 구세군 대한본영,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한국루터회, 기독교한국침례회, 대한성공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의 교단이 함께하고 있는 한글성경의 공인 기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번역한 성경은 개역성경,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새번역 성경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해서 출간한 한글성경이 여럿 있습니다.(현대어 성경, 현대인의 성경, 쉬운성경 등) 그런데 왜 한글성경이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각 번역마다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한글 성경이라도 각 번역들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적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뒤집어 생각하면 여러 번역본들의 차이는 성경의 해석을 풍성하게 해주는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또 용도에 따라서 성경을 선택할 수 있는데, 한국교회가 대부분 예배용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성경은 말은 조금 어렵지만 운율이 있어서 낭독용으로 좋습니다. 통독용으로는 아무래도 이해가 쉬운 현대어로 된 번역이 좋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추천합니다. 한글을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청년이나 청소년들이 읽으려면 쉬운 성경 같은 번역을 추천합니다.


 저는 성서학을 전공한 목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내용이 그리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20년 가까이 목회 사역을 한 이민교회의 목사로 배우고 생각한 내용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한문성경을 전하는 선교사를 죽였던 한 사람이 그에게 받은 성경을 읽고 신자가 된 것처럼 성경에 대한 그 어떤 얘기들보다, 성경을 읽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성경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직한 그리스도인 Honesty Christian  (0) 2018.06.15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Selfish Christian  (0) 2018.06.15
성경이 진리인가요?  (0) 2017.10.25
종교와 개인  (0) 2017.10.20
종교와 사회  (0) 2017.10.20

성경이 진리인가요?


 주일 예배 설교 중에 제목과 똑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듣고 있던 성도들 중 몇 분은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깜짝 놀랄 만큼 우리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생각은 확고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왜 우리가 사는 모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삶 같지도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 같지도 않을까요? 그렇게 중요하고 신성한 성경 말씀이라면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할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성경은 진리가 아닙니다"였습니다. 이거 이단 아닌가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진리입니다." 성경은 진리인 하나님의 뜻, 말씀을 담은 유일한 그릇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리라는 말과 진리를 담은 그릇이라는 것이 그말이 그말인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진리라면 성경은 어떤 오류나 모순도 없어야 합니다. 만약에 오류나 모순이 있다면 그 성경을 근거로 한 믿음은 무너지고 맙니다. 하지만 성경을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받아들인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오류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가치는 여전하게 됩니다.


 성경에 대해 말하는 성경 구절이 몇 군데 있습니다. 먼저 디모데후서 316절의 말씀이 유명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개역개정)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디모데가 성경을 배웠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구원 받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에 신약성경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모든 성경은 성경전서가 아니고 구약 성경입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신약 성경은 없었으니까요.

 보통 이 말씀은 성경이, 그것도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으니 완전하다는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는 진리를 깨닫고 성도들을 가르치는데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또 마태복음 518절의 말씀도 중요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개역개정)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더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성경'이 아닌 '율법'입니다. 물론 이 율법을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말로 볼수도 있습니다. 율법을 구약성경이라고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현실적으로 구약성경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MT)이 있고, 예수님 당시에는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LXX)도 있었습니다.(많은 신약의 구약 인용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닌 70인역 성경을 사용합니다.) 또 여러 사본상의 차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경의 문자들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것 같습니다.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글자들이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전하고자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 진리이며 그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책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담는 그릇'이라는 말로도 제목의 질문에 답이 되겠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경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와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발견해야 할지 얘기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말로 표현되었다는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게도 합니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도 말하는 의도와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훌륭하고 강력한 의사소통의 도구지만 또 한편으로 오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완벽한 말로 표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래서 한 성경을 가지고 여러 해석도 생기고 이단도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언어의 표현 능력이 진리를 완전하게 표현하기에 부족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 불안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언어로 표현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성경 자체가 진리라면 곤란한 점이 많아집니다. 불완전한 진리는 진리가 아니니까요.


성경은 글로 기록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말로 표현되었다'는 내용과 같은것 같지만 ''은 사람이 입으로 표현하는 음성언어이고 ''은 글씨로 쓰는 문자 언어를 가리킵니다. 문자로 쓰여졌기 때문에 기록물로 시간을 초월해 객관적인 매체로 남아있게 됩니다.

 글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이 말보다 내용을 더욱 구체적이고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더욱 구체적이며 기록으로 남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 되지만 표현이 구체적이고 강력해지는 만큼 반대로 의미의 풍성함은 잃게됩니다. 말로 표현할 때의 다양하고 풍성한 느낌과 감정은 줄어듭니다. 저자 직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눈 앞에서 그 표정을 보면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듣는 것과 그 장면을 기록한 복음서의 내용을 읽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이 또한 강력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문자로 기록된 성경 그 자체가 가지는 한계로 인해서 진리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필사되었습니다

 성경은 원본이 없습니다. 원어 성경이라고 해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사본들입니다. 처음 기록된 원본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사본 중의 하나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또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로 해서 그런 순수한 원본은 없다고 봅니다.

 사본은 손으로 베껴쓴 복제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본들이 다 똑같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실수로 틀릴 수도 있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과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다른 내용들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차이가 성경의 중요한 내용들을 손상시킬 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용과 형태가 다른 사본들이 많아서 원본을 알수 없는 성경이 진리라면 그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번역되었습니다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만약에 원어 성경의 사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원본 성경을 복원한다해도 한글이나 영어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는 것처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자기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봐야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원본의 의미와 뜻을 그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번역은 곧 오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어떤 언어도 1:1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번역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잘 옮겨도 비슷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번역성경을 가지고 ."일점일획도 변함 없는 말씀"을 생각하는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번역이 완벽하다면 언어마다 여러가지 번역본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번역이 불완전하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번역성경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경 자체가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진리라고 한다면 모든 번역본이 진리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어떤 특정한 번역본만 진리라는 건가요? 그러면 번역성경은 진리가 아니고 원어성경만 진리인가요? 이런 질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에 말로 표현되고, 다음에 문자로 기록되고, 번역까지 거쳤음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완벽하게 전해진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불안 요소가 있는데 사람이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완벽하다해도 성경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누군가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삶이 구원으로 가야 의미가 있는데, 이 과정이 그야말로 결정적으로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다르고 이해와 해석의 근거가 되는 경험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도 문제지만 성경말씀을 오해한 예도 너무나 많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얼른 생각나는 것만 해도 흑인을 가나안의 후손(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이라고 노예제도를 정당화했던 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며 여성을 무시했던 성차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유태인을 학살 했던 일 등이 모두 성경적인 근거로 정당화했던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역사상에도 그리고 개인의 일상에도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실 이런 예들은 성경을 오해했다기보다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불완전한 성경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성경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나요? 우선 당연하게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경전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자체가 진리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진리의 그릇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감동'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을 변화시켜 그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4:12, 새번역)


 이 성경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사람을 살리는 생명력 입니다. 우주의 법칙과 자연의 신비 속에서도 하나님을 알수 있지만 문서로 기록되고 기독교 공동체의 경전으로 형성된 것은 성경 뿐입니다.


 얼마 전에 모교단의 어떤 교수께서 감리교의 창시자 John Wesley의 신학을 이단적이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뒤에 쓰는 내용이 그에 대한 답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목으로 달아놓은 '성경이 진리인가?'에 대한 대답인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진리'라는 말을 John Wesley의 신학의 틀인 '웨슬리안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그것은 감리교 신학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기준인 '성서, 전통, 이성, 경험'입니다. 이것이 웨슬리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영국 성공회의 '성서, 전통, 이성' 세 가지 기준에 '경험'을 추가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틀로 하나님의 말씀, 뜻인 진리를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지만 벌써 진리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웨슬리안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아는 웨슬리의 방법을 학자들이 정리한 것입니다. '성서'를 통해서 교회 역사의 '전통'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삶의 '경험'에서 얻어진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고 앞에서 말한대로 불완전한 그릇이라면, 그 성경 안에 계시돼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웨슬리의 방법은 성경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검토하고 이해하며 경험을 통해서 더욱 삶에 다가오도록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기독교 신앙의 살아 있는 핵심은 성서 안에 계시 되었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었고, 개인적 경험에서 생기를 얻었고, 이성에 의하여 확고해졌다고 믿었다."(United Methodist Church, The Book of Discipline)


성서

 왜 성경이 아니고 성서라고 할까요? 성경이라고 하면 거룩한 경전이라는 뜻이고 성서라고 하면 거룩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더 경건한 것 같기도 하고 성서라는 용어는 객관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만,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성경과 성서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경전을 뜻하는 일반명사입니다. 불교에서도 '성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경이라는 용어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전통의 영향이 있고, 성서라는 용어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전통의 영향이 있습니다. 한글성경이 처음 번역될 때도 각각 중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번역되어 들어왔습니다. 두 용어의 의미상 차이는 없습니다.


 성서는 기독교 교리를 위한 일차적인 출처요 기준입니다. 일차적이라는 말은 교리와 신학 형성에 있어서 성서가 전통, 이성, 경험 보다 우선하는 표준이라는 말입니다. 성서가 진리를 담은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전통, 이성, 경험이 신앙적인지 이해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표준이 되고 반대로 다른 3가지 요소는 성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이차적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서가 한 책으로 형성되는데 각 책의 저자에게 있었던 성령의 감동이 있었고, 구약성경이 형성되는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신약성경의 고백들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전통

 기독교의 신앙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백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고백한 기독교가 형성한 신앙은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많은 이단 사상의 도전에 대해 성서적 교리와 신학을 세우면서 형성되었습니다. 또 개신교는 '오직 성서 sola scriptura'를 외치며 신앙의 기본을 세웠는데, 그런 반면 카톨릭은 신약성경을 형성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교리와 신학적인 흐름들은 교회의 역사인 전통 안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성서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전통에도 좋은 전통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현대교회 안에 남아서 생명력을 발하는 좋은 전통이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성

 이성은 합리와 과학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 역시 완전하지 않지만 진리를 아는데 쓸 수 있는 좋은 선물입니다. 특히 성경을 읽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도구입니다.

 이성이 진리를 아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수는 없습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전적인 믿음, 즉 인간 사회의 발달이 지상에 낙원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진작에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감리교인의 신앙은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성적인 것이 곧 신앙적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이성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IS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테러 집단인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이성이 하나님을 알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경험

 말로 배우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체득하는 방법은 배우고 이해한 바를 살면서 행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그 순간 그의 믿음은 완성되었고, 바울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데 열정을 쏟을 때 주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  또 사람들이 비슷하게 공유하는 경험을 가질 때 그것을 통해서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경험들로 이야기를 만들어 전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의 비유들입니다.

 글로 읽고, 말로 설명하고, 머리로 이해한 다음에 삶의 순간에 그 진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뜻은 내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도 잘 모르겠던 일들도 경험을 통해서 깊이 있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삶의 경험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고 표현합니다.

웨슬리는 이성을 통해서 신앙을 객관화했고, 경험을 중요하게 여김으로 주관적으로 성경을 나와 관계 있는 살아 있는 믿음으로 해석하게 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으로 유명한 Aldersgate의 체험이 웨슬리가 주님을 만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미국 선교에 열매를 얻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후 Moravian의 영향을 받고 신앙적인 고심을 하던 중 올더스게잇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합니다. 별로 사모하는 마음 없이 참석한 집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 체험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가 됩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신앙의 틀이 되는 경험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경험이 아니라 이처럼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체험을 말합니다.


 존 웨슬리는 죽음을 앞두고 감리회가 교단이 되어서 형식적이고 편협한 신앙을 갖게 될까 염려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감리교회가 웨슬리가 걱정하던 모습이 돼버린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웨슬리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리교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웨슬리안이라고 하는 여러 교단들에 그의 좋은 신앙적인 자산이 살아 있습니다.

 성경이 진리다 아니다하는 논쟁을 할수도 있습니다. 또 웨슬리의 신학이 좋다 아니다를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들의 인생에 실현되어서 천국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캘거리에서 그 길을 꿈꾸며 기도하고 목회하는 한 감리교 목사 고백었습니다.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Selfish Christian  (0) 2018.06.15
성경의 형성과 번역  (2) 2017.10.31
종교와 개인  (0) 2017.10.20
종교와 사회  (0) 2017.10.20
시간여행에 대해서  (0) 2016.06.15

종교와 개인


이경민 목사

캘거리제일감리교회


 종교든 사회든 사람의 일입니다. 종교는 초월적이라 신을 말하는 듯 하지만 사람에 대한 것이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결국 종교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를 위한 것입니다.

 개인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 Individual을 번역한 말입니다. Individual은 영어 Indivisible에서 파생된 낱말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수를 뜻합니다. 요즘은 개인이 아주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문화적인 차이로 생각되는데,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에서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서양 문화가 개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동양 문화에서는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좀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개인이란 실제로는 '나'입니다. 나는 나 외에 다른 개인을 다룰 수 없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개인이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인 나에게 종교는 절대가치를 형성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종교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집단적이 되면 그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가 아닌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 또 어떤 집단의 공유된 가치체계가 종교처럼 작용합니다. 그렇게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처럼 가치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유사종교’라고 합니다.(예를 들면 특정 정치인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의 경우 종교와 비슷하게 집단을 형성하고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가치를 공유합니다. *종교사회학에서는 유사 종교라는 용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상적인 종교가 아닌 사이비 종교 등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존엄성

 세상이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대우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권력자와 영웅이 중요하고 보통 사람들은 그저 군중일 뿐이었습니다. 고등 종교가 태동하고 발전하던 시대조차도 개인으로서 인간이 중요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신에게서 부여 받은(이렇게 말하지만 실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권위로 사람들을 다스리던 왕은 신의 아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왕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때에 하나님 유일신 신앙을 가진 민족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신적 권위에 의해서 약하고 억눌리던 개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보호 받는 삶을 그렸던 것입니다.

 개인인 인간 한명 한명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은 세상에 없던 생각입니다. 종교를 통해서(다른 종교는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를 통해서)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그 개인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흐름이 있은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에서 보장하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말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상식이지만, 슬프게도 그 상식이 실제 세상에서는 참 무기력합니다. 세상은 힘(물리력이 아니라 여러가지 형태의 현대적인 권력)이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억누르고 착취합니다. 참으로 징그럽게도 바뀌지 않는 현실입니다. 차별이 상식인 삶은 사람들을 비참하고 슬프게 합니다.


차별에 대한 반대

 인간이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은 곧 개인에게 고난을 주는 차별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순기능이라면, 종교 자체가 기득권이 되어서 종교 특권층 이외의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역기능이겠죠. 종교에서 특히 기독교에서 걷어져야 하는 부분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핵심에 마틴 루터킹 주니어 목사가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에 근거한 차별 반대 운동은 절대가치에서 나온 행동이었기에 위협이나 박해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전래 초기 조선의 신분과 성차별 타파에 앞장선 것도 기독교였습니다. 물론 기독교나 다른 종교가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한 경우는 더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 살아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근본적인 고백을 생각하면 사람의 편견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걷어내야 할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박해 받는 소수의 위치에 있을 때는 순기능이 컸고, 교회가 기득권을 갖게 되면 역기능이 드러났습니다. 지금은 교회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순기능을 하는 면도 있고, 역기능이 드러나는 면도 있다고 봅니다. 많은 예들을 들 수 있겠지만, 그것을 일일이 지적하느니 보이는 부분들을 고치고 바꿔서 종교로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회복하는데 힘을 쏟는게 낫겠습니다.

 인종차별, 성차별, 소수 약자들이 온갖 차별아래 신음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의 차별들을 찾아 고쳐가고 세상을 향해 차별의 벽을 걷어내도록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내가 왜 죄인이야?

 기독교는 인간 존재를 '죄인'이라는 말로 규정합니다. 이 말이 익숙하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익숙하지 않으면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왜 죄인이라고 하나?'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유명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권위를 느끼고서는 그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 5:8 새번역)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그런 느낌의 죄인이라면 좀 이해가 될까요? 또 다른 면으로 설명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잘못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이 구원 받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할 때,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연약하고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고백이며,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에 의지해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한다고 기분 나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초대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 뿐 아니라 기독교에서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바울도 스스로 자신이 '죄인의 우두머리'(디모데전서 1:15 새번역)라고 했거든요.


종교와 윤리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은 1905년에 독일의 경제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년 4월 21일~1920년 6월 14일)의 저작인데, 그 내용이 개신교의 영향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기술이 정신을 지배한다고 생각 합니다. 기술 발전과 그로 인한 환경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인데, 그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막스 베버가 관찰한 예처럼 정신적인 부분의 변화가 사회를 새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술이 끼치는 영향력이 더 크지만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은 더 중요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종교는 사람에게 절대가치를 형성하고 삶의 의미를 규정하기 때문에 어떤 종교든 그 종교에 독실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직접적으로 규정합니다. 종교가 형성하는 가치판단을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 윤리가 인류에게 좋은 선물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겠지요. 건강한 종교는 건전한 윤리를 만들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윤리를 만드는 종교는 ‘이단’(異端 다를 이, 끝 단)이나 사이비 종교(似而非宗敎, 비슷한데 아닌)라고 평가 받습니다.

 죄의 삶의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삶을 살라는 기독교는 어떤 윤리를 내놓고 있나요? 기독교가 복음의 본질에 적절한 윤리를 제시하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나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종교 宗敎’는 한자말입니다. ‘마루 종’, ‘가르칠 교’입니다. 종宗자의 뜻은 근원이나 으뜸입니다. 풀어 말하면 세상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 그래서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주제로 한다는 말이죠. 가장 중요한 주제란 무엇일까요? 저는 초월적이고 놀랍고 광대한 무엇이라기 보다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움직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말하고, 그래서 그에 맞게 제대로 잘 살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죠. 기독교가 그 역할을 잘 한다면 건강한 종교로 인류와 함께 지속될 것이고,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역사 속에 있었던 종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종교도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갑니다. 발전하고 변화합니다. 본질은 더 갈고 닦아 사람들의 삶을 잘 인도하고, 그 외적인 부분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대응하여 변화해야 합니다. 본질이 아닌 부분을 본질이라고 붙들고 지난 시대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기독교는 사람들에게보다 먼저 하나님에게 버려져 폐기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일까봐 두렵습니다. 제가 그런 목사일까봐 떨립니다.

'말 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의 형성과 번역  (2) 2017.10.31
성경이 진리인가요?  (0) 2017.10.25
종교와 사회  (0) 2017.10.20
시간여행에 대해서  (0) 2016.06.15
한국어, 한글, 우리말  (0) 2014.06.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