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무엇일까? 전쟁일까? 전염병일까? 사람에 의한 살인? 아니면 자살? 모두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바로 모기라고 한다. 모기에 물린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모기가 피를 빨 때 전염되는 병으로 죽은 숫자가 다른 요인보다 훨씬 많다. 현재도 연간 50만 명 정도가 모기가 옮긴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일본 뇌염, 말라리아, 황열, 뎅기열, 웨스트나일열, 치쿤구니야열, 지카 바이러스 감염증, 상피병 등 수 많은 질병이 모기에 의해서 전염된다.
 모기는 무서운 질병을 옮기는 것 외에도 여름이면 사람을 정말 불편하고 귀찮게 한다. 백해무익한 것 같은 모기가 싹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에 세상의 모든 모기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선 예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는 세계 인구의 증가다. 모기가 옮긴 병으로 사망하는 숫자가 죽지 않게 되니 인구가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모기가 옮기는 질병을 위해 각 나라에서 사용되는 비용이 필요 없게 되어서 다른 곳에 사용될 수 있다. 복지가 더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어쩌면 초콜릿이 사라질 수 있다. 초콜릿의 재료는 카카오인데, 모기가 카카오 나무의 꽃가루 수분을 한다. 모기가 이렇게 수분을 하는 식물은 카카오 외에도 많다. 수분이 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멸종하게 될 것이다. 또 모기 유충인 장구벌레가 사라지면 장구벌레를 먹는 새, 박쥐, 물고기, 개구리 등의 먹이 사슬 균형이 깨져서 심각한 생태계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
 순록의 이동 경로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는데, 모기가 순록 한 마리당 하루 평균 200mL의 피를 빨아 먹는다. 그래서 순록은 모기를 피하려고 바람을 거슬러 이동한다. 순록 떼의 이동 경로가 바뀌면 순록 떼가 지나가는 지역의 토양과 식물의 분포, 순록을 먹이로 하는 육식동물 분포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한다. 세상에서 모기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모기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이며, 어쩌면 인구 조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기가 있어서 좋은 점이 분명히 있다.

 새옹지마 이야기의 교훈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 보다는 좋은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낫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너무 신나 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것 보다 마음을 다스려서 침착하게 자기 길을 지키는 것이 좋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예전부터 인류를 고생 시켰다. 2003년 ‘사스’도, 2015년 ‘메르스’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것이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2019년에 감염이 시작돼서 ‘코로나 19’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이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등의 영향도 있었지만 인류의 생활 방식을 아주 짧은 시간에 바꿔 버렸다. 유행이 시작되고도 한참을 마스크를 거부하던 백인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은 잘 쓰고 다닌다. 인터넷으로 회의를 하거나 학교 수업을 하거나 교회 예배를 드리게 됐다. 온라인 쇼핑이 더욱 가속화되고 발전했다. 음식 배달 업계가 급부상 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유행이 인류 문명사의 변화를 10년 정도 앞당겼다는 말도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상상만 하던 일들이 이제 일상이 되었다.

 교회가 가장 치명타를 입었다. 예배를 중심으로, 모여서 예배하기에 열심이었던 교회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앞에서 모여서 예배하지 못하는, 그래서 힘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거나 아니면 모여서 예배하느라 세상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영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 년 반을 지나고 있는 팬데믹은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을 깊이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모여서 예배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인터넷을 통해 예배 드리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예배에 은혜가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앞으로 교회는 무엇을 힘써야 하는가? 화상 회의를 교회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현실적인 답들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는 자신이 진정한 믿음이 있었는가를 점검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나빠서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일이라도 좋은 부분은 꼭 있다. 또 반대로 세상에 좋기만 한 일도 없다. 좋은 일 같으나 인생을 망가뜨리는 시작이 되는 일도 있다.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일들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태도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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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주 최소 두번의 설교를 하는 설교자다.

노안이 오셔서 작은 글씨로 인쇄한 원고를 보기가 불편해 폰트를 좀 키웠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지금은 노트북 컴퓨터나 타블렛으로 볼수 있게 작성한 원고를 pdf파일로 변환해서 본다.

나름 노하우가 쌓여서 그 방법을 나눠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는 워드프로세서로 원고 작업을 하고, 그 파일을 그대로 pdf로 변환하는 것이고

중요한 점은 할수 있는대로 잘 보이는 형태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핵심은 두가지다. 보려는 기기의 해상도 비율에 맞춰서 원고를 만들고

배경은 검은색, 글씨는 하얀색으로 만들어서 가독성을 높여준다.

여기까지만 애기해도 다 알아들으시는 분도 있겠지만, 혹시나 도움이 될 분이 있으실까 싶어 자세히 적어 보겠다.

 

우선 나는 온라인으로 예배할 때는 노트북 컴퓨터로 원고를 보고, 대면예배로 할 때는 타블렛으로 원고를 본다.

그래서 기기가 바뀌는대로 문서 크기를 바꿔야 하는데 그것은 워드프로세서 문서 설정에서 규격을 사용자로 해서 입력해 주면 된다. 예를 들면, 1600*900 해상도인 노트북 컴퓨터에서 볼  원고는 문서 크기를 16cm*9cm로 설정한다.

중요한 노하우가 하나 더 있는데, 여백을 0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pdf로 만들어서 전체화면으로 볼때 화면 전체를 사용해서 볼수 있다.

 

문서 크기는 원고 작성 전에 설정할 수도 있고, 중간에 할 수도 있고, 마치고 해도 된다. 나는 처음부터 적용하고 원고작성을 시작한다.

 

그 다음은 문서 바탕 색깔을 검은색으로 바꾼다. 그리고 글자색을 하얀색으로 바꾼다. 내가 사용하는 Libre office writer은 문서 바탕 색을 검은색으로 바꾸면 글자색이 하얀색으로 자동 적용된다.

그리고 pdf파일로 변환해서 전체화면으로 띄워보는 확인 과정이 필요한데, 자기 눈에 가장 편한 폰트 사이즈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번거롭지만 한번만 확인하면 다음부터는 그 크기로 그대로 작성하면 된다.

1600*900해상도의 노트북에 쓸 파일은 폰트 14, 1920*1280해상도에 8인치인 타블렛은 폰트 9로 설정하니 보기 좋았다.

(타블렛용 문서 사이즈는 예를 안들었는데, 넘나 쉽다. 19.20cm에 12.80cm면 된다.)

 

이제 원고를 작성하고 줄간격도 보기 좋게 조절하고, 인용이나 핵심어나 강조할 표현 등을 폰트를 바꾸던가, 밑줄을 긋던가, 폰트 색을 바꾸던가(강조 폰트 색은 노란색을 쓴다) 마음대로 작성해 준다.

이렇게 원고 작성이 끝나면 워드파일은 두고 pdf로 변환해주고, pdf뷰어로 열어서 보면 된다.

pdf뷰어도 잘 선택하면 좋다. 페이지를 한번에 간단히 넘길수 있어야 하고, 편집기능이 있으면 다시 읽다가 추가할 내용을 메모할 때도 좋다.

별것 아니지만 나름 고민한 노하우니 필요한 분에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설정 중인 퍼피 리눅스 화면 캡처 >

 

 

퍼피 리눅스 설정 중이다.
설치 용량이 작으면서 있을 건 다 있고, 가볍고, usb memory 같은 저장장치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 다른 컴퓨터에서 항상 같은 환경으로 사용할 수 있기에 관심을 가졌던 리눅스 배포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리눅스 배포판에서 항상 가장 중요한 문제다. 바로 한글 입력 설정이다.

아무리 좋은 리눅스라도 한글 타자가 되지 않으면 쓰기가 어렵다.

예전에 퍼피 리눅스에 관심을 갖고 검색을 해봤지만 한글 입력 설정에 관한 내용은 많지 않았고, 있는 것은 따라 해 봐도 되지 않았다.

우연히 다시 설정을 해보던 중 너무 쉽게 설정이 되서 기록으로 남긴다.

 

현재 가장 높은 퍼피리눅스 버전은 우분투를 기반으로 한 9.5 버전이다. 8.0 버전에서 한글 설정이 잘 안돼서 7.0으로 설정했는데 잘 되었다.

퍼피 리눅스는 하드에 설치할 수도 있지만 굳이 설치하지 않고 usb에 넣어서 부팅만 해주면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다.

7.0 기준으로 한글 설정 방법을 기록한다.

1. 기본 부팅 후 원하는 설정들을 하고, Set up menu에서 puppy pakage manager을 실행한다.(캡처 화면에서 왼쪽 위, 'Applications' 글씨를 클릭하면 메뉴가 뜬다.)

2. 퍼피 패키지 매니저에서 SCIM입력기를 검색해서 설치한다.(경우에 따라서 퍼피 패키지 매니저에서 hangul input으로 검색할 때 scim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안 나오면 scim을 직접 검색해서 설치하면 된다. 할 때마다 똑같지가 않다.)

3. 퍼피 패키지 매니저에서 scim hangul을 검색해서 scim-hangul을 설치한다.(이것도 한번은 scim을 설치한 후 한글이 있어서 따로 설치하지 않았는데, 또 한 번은 한글이 없어서 이걸 따로 설치한 후 사용이 가능했다.)

4. Utility menu에서 scim startup을 실행한다. 그러면 태스크바에 키보드 모양의 아이콘이 뜨고 설정하는 대화창이 뜬다. 필요한대로 설정을 하고 사용하면 한글을 쓸 수 있다.

5. 그런데 한글과 영문을 전환하는 단축기는 쓰지 못하고 있다. 설정이 잘 안된다. 그래서 태스크 바에 있는 아이콘을 왼쪽 클릭하면 설정된 언어를 마우스로 바꿔서 쓸수 있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되는 게 어딘가


*추가로 설치(설정)할 것

- 한글 폰트가 없으면 한글 입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웹페이지를 열어도 아마 한글이 깨져서 보일 것이다. 한글 폰트는 따로 구해서 메뉴중 가장 위에 있는 desktop 아래에 font manager을 실행해서 설치해준다. 해보니까 어떤건 되고, 어떤건 안되고 그때 그때 다르다. 나는 '나눔고딕' 폰트를 설치했다.

- 브라우저가 파이어폭스가 기본 설치돼 있다. 파폭도 좋지만 브라우저를 여러개 사용하는 편이라 추가로 설치해 주었다. Applications-Setup을 열면 중간 아래쯤에 웹브라우저를 추가 설치하는 메뉴가 있다. 브레이브 브라우저를 먼저 설치했는데 문제가 있는지 실행이 안된다. 그래서 크롬을 설치했더니 잘 된다.

- 오피스는 Libreoffice를 쓰기 때문에, 추가로 설치해줬다. 설치하지 않아도 abiword가 기본으로 설치돼 있기는 하다. 나는 쓰는 자료가 다 리브레 오피스라 추가 설치해줬다. 리브레 오피스는 MS office에 대응되는 완성도 높은 오피스 수트다. 추천한다.

 

 이 정도면 내가 업무용으로 쓰는데 지장이 없다.

 말은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은 인생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말을 제대로 하고 글을 제대로 쓰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적당히 대충 말하고 글을 쓰면 삶의 자세도 명확하지 않고 생각도 흐릿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말로 생각하고 말로 이해하고 그 틀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일에 대해서도 대충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적이다’, ‘믿음이 좋다’는 말이 바로 그런 중요한 말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신앙은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러면 ‘신앙적’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핵심만 말하면, ‘그 믿는 바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에서 ‘믿는 바’는 무엇인가요? 사도신경의 내용을 참고하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의 전능하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믿고, 성령이 나와 함께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믿는 것’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을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 내면의 작용이기에 사실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고, 그것으로 짐작할 수는 있지만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신앙적이라고 평가하고 또 어떤 생각에 대해서 그 생각은 신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믿음이 좋다’고 참 ‘신앙적’이라고 말하고 ‘신앙적인 자세는 이래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떨 때 그런 말을 하죠? 어떤 사람이 교회에 잘 다니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또 말을 할 때, 교회에서 많이 쓰는 교회 용어들과 은혜로운 표현들을 많이 하면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적이고 믿음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기분은 좋겠지만 그것이 진짜로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통해 주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성도님들께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남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자>

우리가 교회에서 쉽게 누군가를 신앙적이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이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앞에서 얘기한 대로 그것은 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남의 신앙을 판단하는 일이 내 신앙에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해를 끼칩니다.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믿음을 따라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나 자신을 돌아볼 때만 묻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 신앙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자>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믿음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정말 귀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평가를 사람에게서 구한다면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우리 마음 중에도 그런 생각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려고 노력하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만남을 갖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에 매일 힘쓰고, 깨닫고 알게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사는 길입니다. 하루 하루 이 일에 더욱 깊어져 가는 것이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COVID-19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힘들 때 성도들이 주님 닮은 모습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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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 목사

캘거리제일감리교회

 대부분의 종교는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전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Canon은 길이를 재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원 상 갈대라는 의미를 가진 말인데, 그 의미에서 길이를 재는 자, 척도, 기준의 의미가 나왔고, 그 말을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경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카메라 회사인 캐논이 영어 표기가 같은데, 카메라의 기준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기도 했지만 원래는 불교 용어인 '관음'을 뜻하는 일본어 발음인 '칸논' 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 기록되었고 또 오랜 시간의 역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기준으로 인정된 책들의 모음입니다. 인정이란 말은 그 안에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성경적'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적이라고 하면 진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말의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별로 성경적인 것 같지 않은 생각에 성경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을 사용하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만 하면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기준이 성경이므로 우리는 성도로 살면서 만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질문의 답을 직접적으로 주지 않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지금의 우리 세상과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정말 성경적인 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경 구절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단순하기 않기에 '성경적'이라는 말을 쉽게 쓸 일이 아닙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참 신앙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생각해 보니 ‘그게 과연 옳은 표현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는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서는 성경적이면 안됩니다. 신앙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은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치관'도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시는 것을 크게 보고, 하나님이 작게 보시는 것을 작게 보아야 합니다. '성경적 역사관'도 말이 됩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양하지만 신앙인이 역사를 보는 관점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이면 곤란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그렇습니다. 좋은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일까요? 성경의 내용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좁은 의미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고, 노래들도 있고 다양한 시대에 쓰인 다양한 문학 형태가 섞여 있습니다. 어떤 부분엔 아주 고대의 자연관, 우주관,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지금 우리도 성경에 있는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최신 연대는 언제일까요? 늦게 기록된 신약 성경이 기원후 1세기 전후의 글이라면 지금부터 2,000년 정도 이전의 글이고, 구약으로 가면 거기에 1,000년 이상을 더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교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있던 삼국 시대 초반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고대인의 세계관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말이라고 다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 그것을 담고 있어야 진짜 성경적인 것입니다. 성경적인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성경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성경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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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평화성결교회(http://peace-kehc.org/xe/Scores/182154)

 

주의 도를 알리소서 - 찬양자료 악보/가사/PPT - 평택 평화성결교회

주의 도를 내게 알리소서 진리의 길로 행하리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리라 내 마음 다하여 나의 마음을 씻어주시고 내 발걸음을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나의 마음을 씻어주시고 내 발걸음을 주의

peace-kehc.org

사이트에서 받은 악보 자료가 잘린 부분이 있어서 수정했습니다.
교회 사이트에 업로드 해드려고자 했으나 할수 없어서
제 블로그에 올립니다.

 

 살면서 좋은 사람,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실없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을 만나고,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을 만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끼리끼리 만나게 돼서 그런가요?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다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나보다 생각해 봅니다. ‘내 곁에는 참 좋은 사람이 많아’ 아니면 ‘내 주변에는 왜 이런 사람들만 있지?’ 어느 쪽에 가까우신가요?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도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대신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자세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알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는 기준은 여러가지지만, 그 방법도 중요합니다. 사람을 볼 때는, 내 이익과 손해로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봐야 합니다. 보통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저 사람이 나에게 이익을 줄까, 손해를 줄까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필요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에 나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본다는 것은 아주 단순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은 성품을 타고나며,그 성품을 가지고 인격을 형성해 갑니다. 그리고 생각과 행동이 거기서 나옵니다. 말과 겉모습은 꾸밀 수 있지만 성품과 인격은 꾸밀 수가 없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의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예의에는 성품과 인격 그리고 행동과 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모두 나타납니다. 예의 바른 사람은 대체로 괜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관계에서 실패하는 것은 내 이익과 손해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는 자기 수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주 큰 착각입니다. 사람은 제각각 모두 다릅니다. 모든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다르게 살아갑니다.

 사람을 잘 분별하는 방법은 나의 안목을 높이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자꾸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을 만나시나요? 아닐 수도 있지만, 아마도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이익을 생각하면 그것이 내 눈을 가립니다. 내 손해를 생각하면 그것이 눈을 가립니다. 사람을 보기보다 상황과 외적인 조건을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내 상황이 아니라, 그 사람을 중요하게 봐야 하기 때문에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중요합니다.

 

 살다보면 사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을 때가 있고, 교회에서도 사역이나 직분을 맡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맡겨진 역할을 잘해서 유익을 끼치고 칭찬받습니다.어떤 사람은 잘할 것 같았는데, 막상 하고 보니 역할도 못하고, 잘못된 처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생각 외로 아주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리에 오르면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을때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자리에 오르고 나니 사람이 이상하게 변합니다. 사람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한 후로는 사람을 믿지 말고, 원칙과 제도를 잘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비지니스에서 직원을 뽑을 때 모든 사람이 잘한다고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를 뽑을 때도 다 잘하겠다고 하지만 결과에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이 자리에서 역할을 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조금 부족해도, 자리를 맡으면 책임감도 생기고, 열심히 해서 잘하게 될까요? 자리가 사람을 만들까요? 아니면 사람의 자질이 자리에서 발휘되는 것일까요? 두 가지 면이 다 있을 것입니다. 생각 끝에 사람마다 다르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좋은 사람을 찾아서 만나고 함께하는 것은 복입니다. 그리고 만난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다 잘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만남을 다 망쳐버릴 만큼 나쁜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태도는 존중과 배려입니다. 어떤 관계든 서로 존중하고, 서로 배려하면 문제도 쉽게 풀리고 일은 잘 될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가 살아갈 길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좋은 선택을 하며 좋은 관계를 이루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나쁜 선택을 하고 관계를 깨며 살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좋은 사람 되시고, 좋은 관계 가운데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며칠 전에 자다가 꿈을 꿨습니다. 성경에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가끔씩 개꿈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아닌가 하는 왠지 아주 중요한 것 같은 꿈을 꿉니다.제가 꾼 꿈은 그런 특별한 계시의 꿈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개꿈도 아니었습니다. 나름 의미가 있는 제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꿈이었습니다.

저는 꿈을 무의식과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의식은 또다른 나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내가 너무 힘들거나,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으면 꿈을 통해서, '너 너무 힘들어, 쉬어야 해' 라거나 '이거 중요한 거 잊어버리고 있잖아~'하고 알려주는 또다른 나입니다.

 

 그 며칠 전 꿈에 저와 어떤 멋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옷을 잘 입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 옷 입은 거 어때?" 아내는 "어 멋있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가만보니 저도 그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옷이 어떤가 보다. 몸매와 얼굴이 중요한 거 아냐?"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렇지" 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외모지상주의자야~"

여기서 아내는 제 꿈속에서 말한 사람이니까, 현실의 제 아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꿈을 꾸고 바로 깼는데, 내용이 재미 있어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중심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중심이 중요하지만, 사람은 그 중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만나서 시간을 가지고 겪어봐야 조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겉모습을 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고 그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만남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만남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만나서 함께해야 할 때,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선입견을 갖거나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눈을 구하며 판단을 보류해야 합니다.

 살면서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데, 노력과 통찰력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사람의 중심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한국만큼 외모를 중시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옷도 잘 입고, 화장도 잘 하고, 머리도 잘 꾸밉니다. 남자들도 눈썹 다듬고, 피부 관리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렇게 외모를 꾸미면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기에 외모도 능력이라고 합니다.

외국에 나와 살다 보니,이곳도 외모에 따라 선입견을 갖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한국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하는게 아니라, 그만큼 경쟁을 해야 하는 사회라서 조금이라도 더 경쟁력을 가지려는 노력이기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외모의 힘은 처음 만날 때부터 작용해서 시간이 갈수록 영향력이 약해집니다. 만날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성격과 성품, 인격 등이 더 중요합니다. 외모를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내면을 가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Career를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요한 실력을 키워야 하고, 외모를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격이나 지식이나 특별히 우리는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 아닐까요?

 

 하지만 외모가 부족한 사람은 열등감과 상처를 안고 삽니다. 그래서 스스로 내면을 가꿀 힘을 갖기도 어렵습니다. 어려서부터 못난 외모에 무시 당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내면을 키워서 당당하고 따뜻하고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가꿔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고 기억할 것은 외모와 성격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여기시며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경험하며 살 때, 외모나 조건에 관계 없이 당당하게, 자신있게 내면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꿈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두 가지 다짐을 해 봅니다.

하나는 '사실보다는 마음을 말하자'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처 받기보다는 자신을 가꾸자'는 것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친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외모를 묻거나, ‘저 사람 어때?’하고 묻기도 합니다. 그 때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는,마음’을 말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날씬하지 않은 몸을 보면서, 나 뚱뚱하지?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남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화낼 테고,날씬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삐질 테니까요.객관적인 사실을 말할 필요도 없고,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땐 마음을 말합니다. "내 눈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멋있어)", "당신은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이런 말입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말, 사랑을 표현하는 말, 진심을 담은 말이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존귀한 존재로 만듭니다.

 

 저는 사춘기 때 만족이 안 되는 외모를 고민하다가 내 책임이 아닌 유전의 일은 내가 고민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보다가, 예수님이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6:27)" 하신 말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외모에 대해서는 잘 씻고, 얼굴의 털들을 잘 관리하고, 옷을 신경써서 입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면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외모가 빼어나지 않다고 열등감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또 외모에 대한 평가에 상처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격을 가꾸고, 지식을 쌓고, 교양을 쌓고, 인격을 성숙시켜가며, 필요한 능력을 키우고, 좋은 생각으로 마음을 가꾸고, 건강한 믿음으로 사는 길이 더 행복한 인생으로 가는 길입니다.

 

 옛날에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착하고 노래 잘하지만 뚱뚱해서 무대에 서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던 주인공이 전신성형을 해서 날씬하고 예뻐진 후에 가수가 되고 인기도 얻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 안에 외모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 외모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오래 지낼수록 그 중심의 가치를 알아보게 됩니다.

 

 젊어서 예쁘고 잘 생겼다고 해봤자 나이가 들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몸도 늙어갑니다. 외모가 전성기를 지나고, 또 경제력이 전성기를 지나면 남는 것은 살아온 흔적과 내면의 아름다움 뿐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수록 내면이 깊어지고 지혜로워지며, 대하기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렇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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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금방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Jehovah’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단 종파인 ‘여호와의 증인 Jehovah's Witnesses’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집착하는 이단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오고, 그중에 ‘여호와’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명칭이 있습니다. 모음

이 없었던 고대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를 알파벳으로 표시하면 YHWH가 되는데, 문자로 표시는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여 소리 내어 읽지 않았고(혹은 아도나이라는 말로 대체해 읽었음), 결국 그 발음이 잊혀졌습니다. 그 자음의 발음에 하나님을 뜻하는 또 다른 호칭인 ‘아도나이(나의 주님)’의 모음을 합해서 ‘여호와’라는 발음을 만들었고, 그것이 성경에 쓰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자료에서도 여호와가 정확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전통을 인정해서 그대로 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정확한 발음은 무엇일까요? 사실 사라진 발음이기 때문에 정확한 발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야웨’라는 발음이 원래 발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야웨’가 하나님의 이름일까요?

 

 성경 출애굽기 3:13~15은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시고,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밝히는 표현이 나오고, 또 ‘여호와’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모세의 질문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화를 반영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냐는 것입니다. 그 말은 어떤 능력을 가진 신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이름은 능력과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이고 또 수많은 신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신이냐고 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시면서 결국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 ‘I am who I am’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다’, ‘나는 누가 창조한 존재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있게 하는 존재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그 ‘여호와’라는 말은 YHWH를 번역한 것이고 그 말은 위에서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히브리어 발음이 ‘예흐웨 아쉐르 예흐웨’ 임,아쉐르’가 who로 관계대명사, ‘예흐웨’가 나는 있다는 의미)

 

 그런데 이 의미를 조금 더 깊게 해석하는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이 ‘예흐웨’가 히브리어 문법으로 미완료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문맥에 따라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로 해석이 가능한데, I’m who I’m은 현재로 해석하는 것이지만, 히브리어의 어감을 살리는 번역은 ‘I will be what I will be’입니다. ‘나는 내가 앞으로 할 일을 통해 어떤 존재인지 보여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고? 과거에 내가 한 일을 봐라.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봐라.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을 보면 알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나는 너를 통해서 나의 뜻을 이루는 자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의 출처는 팟캐스트 비블리아(podbbang.com)42화 내용 중 후반부에 나온 내용이며, 독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중세 유대 랍비의 해석이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은 어떤 이름으로 규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식과 지혜와 상상을 넘어계신 분으로,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그 뜻을 구하고 순종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뿐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나의 인생에 함께 하시며 인도해 주신 하나님,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의 미래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실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그 터전이 되기를 바라고, 각자 맡겨주신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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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번 들어봐야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죠. 영어 표현에도 비슷한 말이 있네요. Seeing is believing. 사람이 세상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감각의 비율이 시각이 80%, 청각이 10%, 기타 나머지 감각이 10% 정도라고 합니다. 뇌에서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부분이 다른 감각을 담당하는 부분보다 훨씬 발달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면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까요? 보통은 그렇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이 보이지 않거나 시력이 나빠서 잘 안 보인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또 시각 정보가 강력하고 판단에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눈에 보이는 부분만 속인다면 거짓을 사실로 믿게 될 것입니다.

 아주 옛날 영화인데, Back to the future의 한 장면을 원래 배우가 아닌, 아이언 맨의 Robert Downey, Jr.와 스파이더 맨의 Tom Holland로 얼굴을 바꾼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감쪽 같았습니다. Deep fake라는 얼굴 바꾸기 기술로 만든 장면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그래픽은 사실이 아닌데 눈으로 보기에 사실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영상은 Youtube에서 ‘Robert Downey Jr and Tom Holland in Back to the future - This is heavy! [ deepfake ]’을 검색해서 볼 수 있습니다.)

 

 착시현상은 눈을 통해서 우리의 뇌를 속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줍니다.

 옆에 있는 세 선의 길이는 모두 같습니다. 하지만 화살표를 어느 방향으로 그려주는지에 따라서 같은 길이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분명히 봤는데, 잘못 본것을 믿었다가 실수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용해서 보는 사람을 속이는 기술입니다.

 인간에게 시각 정보는 가장 구체적이고 믿을만한 정보이면서 반대로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입니다.

 

 세상에 제일 못 믿을 것이 광고입니다. 광고의 목적은 보는 사람에게 너무 좋은 것, 꼭 필요한 것이니 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팔려는 상품의 좋은 점은 더 크게 강조하고 안 좋은 점은 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은데 사고나서는 후회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다가, 보는 것과 믿는 것에 대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두 군데 말씀인데, 하나는 요한복음 20:29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입니다. 예수께서 ‘직접 보고 상처를 확인하기 전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 던 도마에게 찾아와 하신 말씀입니다. 또 다른 곳은 마태복음 28:17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봐야 믿겠다는 도마와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눈으로 확인해야 믿고, 어떤 이는 봐도 믿지 못합니다. ‘보는 것’, ‘믿는 것’, 말은 같지만 시각 정보를 믿는 것과 신앙의 믿는 것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살이 가운데서는 보는 것을 그대로 다 믿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고 걸러야 할것은 뭘까요? 또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씩만 얘기해 보겠습니다. 관심도 두지 말고 걸러야 할 것은 이단이죠. 처음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아닌것처럼 접근하기 때문에 미리 알아두고 잘 걸러야 합니다. 확인하지 않아도 믿어야 할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생각할 때 나 자신이 사랑받을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부족함이나 못남보다 그것을 다 덮는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 모두 평생 그 사랑 안에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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